<상하이 블루스 - 마지막편> 여정을 마치며

등록 2002.09.24 10:51수정 2002.09.24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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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어제의 발 마사지가 효과가 있었는지 일어나는 몸이 가뿐하다. 오늘이 행사 마지막 날임을 상기하고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닭죽과 과일로 서둘러 식사를 간단히 마친 후,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양동작전을 구사하기로 한다. 직접 호객을 하는 어제의 정공법과 함께, 한국관 입구 안내데스크에 우리의 카탈로그를 배포해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측면 지원을 받는다. 정면 돌파가 여의치 않을 때는 측면 사격이 위력을 발휘하고, 측면의 지원이 뜸해지면 정면 돌파가 효력을 발휘한다.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일찍 장이 폐하리라는 예상을 하며, 총탄의 수량을 조절하여 배급하는 완급의 전술도 부려본다. 전투에 한창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오전이 흘러가 버린다.

a 전시장내 필자의 부스

전시장내 필자의 부스 ⓒ 류근하

점심식사는 역시 싸구려 현지식이다. 밥은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먹었고, 좀 짜서 남긴 반찬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지음식에 적응이 되었는데 벌써 마지막 도시락 식사라니.

전투는 막바지를 향해 치닫는다. 때론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적'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며 4인의 연합특공대는 훌륭히 임무 수행을 한다. 한꺼번에 집중 사격을 하기도 하고, 번갈아가며 교대로 기관총을 난사하기도 한다. 정신없이 전장을 누비다 보니 피아간에 누가 전리품을 획득하는 승리자인지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전투가 끝나간다.

옆 초소들에서는 철수 명령을 받아 군장을 꾸리느라 분주하다. 우리는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발의 실탄까지도 다 소비한 후 그제서야 철수 작업을 한다. 지난 나흘간의 의미와 목표달성의 분석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리는 장비들을 꼼꼼히 다시 챙겨 넣으며 짧고도 긴 시간 동안 함께 한 전우애를 확인해 보는 것으로 드디어 장을 마감한다.

호텔에 도착한 후, 그 동안 제 일처럼 열심히 솔선수범하여 도와 준 '착한 구슬(玉善)' 조선족 처자에게 깊이 감사하며, 서울에 오거나 이곳에 들를 기회가 있으면 연락을 하자고 약조를 하며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저녁이기에 현지식 식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들른 곳은 호텔 근처의 평민급 식당이다. 완전 촌놈인 동료와 나는 처음으로 남의 도움없이 식사 주문을 하는 대담성을 보인다. 곁가지로 말해두자면, 이곳에서 식사를 할 때는 극도로 인내심이 요구된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절대 현지 식당을 찾지 마시라. 지금까지 현지 전통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 최소한 20분 내에 끝난 적이 없다.

더군다나 이곳 음식명에는 완전 촌놈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주문하느라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 속으로는 제발 멋들어진 주문이 되었기를 빌었다. 처음으로 나온 음식은 우리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나온 음식들은 우리의 촌스러움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기름으로 범벅된 것들뿐이다.


식대가 아까워 꾸역꾸역 참고 삼킨 기름덩어리들이 결국 배탈로 이어져, 유치원 수준의 가무를 보여주는 쇼를 그나마 제대로 보지 못하고, 호텔방에서 한 시간을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현지음식에 완벽히 적응했다는 나의 섣부른 과시욕이 일거에 물거품이 되며, 이 나라를 알려면 음식부터 익혀야한다는 교훈을 쓰라리게 배운다.

a 남경로보행가의 밤거리 모습

남경로보행가의 밤거리 모습 ⓒ 류근하

여정의 마지막 밤을 호텔 침대 위에서 마감할 수 없다는 치기가 일어나 동료와 함께 시내 유람을 나선다. 전철을 타고 간 곳은 '남경로보행가'라는 번화가이다. 이국 풍물을 기억에 담아두려 천천히 인파에 덮인 거리를 걸으며, 남대문시장 같은 장터를, 압구정 로데오 거리 같은 첨단 부띠끄들을 기웃거려본다.

한 시간 이상 윈도우 쇼핑을 하는 가운데서도 참새가 거쳐갈 만한 방앗간이 눈에 띄지도 않고 - 사실은 두 촌놈이 간판을 못 읽는 까막눈이다 - 허리 다리도 아프고 하여, 다시 전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온다.

이로써 나의 여정은 끝이 난다. 지난 며칠간 흘린 땀들이 어떤 보상으로 올지는 모른다. 우리의 행위가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한 순간마다 정직했다고, 주어진 삶에 치열히 순종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만은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였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우리의 몫이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이지만 태산만한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고, 스쳐지나 기억조차 못하는 바람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슨 색깔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우리는, 나는 받아들이련다. 두 뺨을 스치는 강바람이 그저 흘러가는 것인지, 아니면 향수를 머금고 다시 찾아와 줄지는 신만이 아신다.

a 노신공원(구 홍구공원)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비

노신공원(구 홍구공원)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비 ⓒ 류근하

이 곳은 가볼 만한 데가 많다. 그 중 대륙이 낳은 대문호의 문학적 열정과, 목숨을 던져 나라의 독립을 그린 의사의 분기탱천이 살아 숨쉴 '노신공원'을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많다. 하지만 다음의 기약을 위해 한 군데쯤 미답으로 남기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감상을 덧붙인다.

내일이면 그리운 내 땅을 밟는다. 내 사랑하는 가족과 보고픈 이들과의 재회에 마음이 들떤다. 다들 예전 그 모습으로 있겠지.

나의 넋두리를 들어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블루스의 피날레를 장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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