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비운의 현장

[문화유산답사35] '을사조약' 체결 장소, 정동 중명전

등록 2002.09.30 14:57수정 2002.09.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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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돌담길에 서면 애련함이 밀려온다- 경운궁 돌담길은 연인들의 길이기 이전에 대한제국의 비운이 서린 길이다. 특히 일제는 경운궁을 관통하는 길을 여럿 냄으로써 조선의 기운을 꺾고자 했다.
경운궁 돌담길에 서면 애련함이 밀려온다- 경운궁 돌담길은 연인들의 길이기 이전에 대한제국의 비운이 서린 길이다. 특히 일제는 경운궁을 관통하는 길을 여럿 냄으로써 조선의 기운을 꺾고자 했다.권기봉
요즈음 들어 두 여중생이 미군이 몰던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치여 사망하고 술 취한 미군 장교가 뺑소니를 치고 달아나다가 이를 뒤쫓던 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주한미군의 범죄가 빈발해 그 동안 잠잠하던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90년대 이후 쑥 들어간 것 같던 반미시위에 대학생들은 물론 일반 시민과 중·고등학생들까지 가세해 다시금 활성화되는 데에는 한국인들의 분하고 서러운 감정도 한몫 했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해가 가도 바뀌지 않는 근본적인 문제를 이 참에 해결해보자고 나선 구석이 더 커 보인다. 즉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지난 1953년 10월 워싱턴에서 한국과 미국 두 나라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중 특히 제4조와 제6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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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항에 의하면 '미국이 육군과 해군,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 정부가 허여(許與)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조약의 기한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고 못박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불평등한 구석이 다분한 조약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조약이 맺어지기 약 50년 전, 대한제국 정부는 거의 비슷한 조항을 담은 문서를 가지고 일본과 협정을 맺은 적이 있다. 바로 '을사조약'으로 알려져 있는 '제2차 한일협약'이 바로 그것.

1904년 4월 14일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에서 일본의 고문정치를 인정한 이후 거의 1년 반만인 1905년 11월 17일에 맺어진 을사조약은 '조선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는 조약'에 다름 아닌, 동서고금에 그 유래가 없을 만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런데 이 조약을 체결한 장소가 아직도 조용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관조하고 있어 미국과의 관계로 나라가 시끄러운 이때 마음이 더 뒤숭숭한가보다.

이 아름다운 돌담마저도- 일제는 경운궁을 두르고 있던 돌담이 한국식이라는 이유로 헐어낸 뒤 콘크리트로 다시 만들었고, 담장 주변에 일본인들의 최고 관상수 중 하나인 향나무와 포플러, 은행나무 등을 심어 왕실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자 했다.
이 아름다운 돌담마저도- 일제는 경운궁을 두르고 있던 돌담이 한국식이라는 이유로 헐어낸 뒤 콘크리트로 다시 만들었고, 담장 주변에 일본인들의 최고 관상수 중 하나인 향나무와 포플러, 은행나무 등을 심어 왕실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자 했다.권기봉
조약 내용도 비슷했기 때문인지 이 건물이 위치한 장소도 미국과 연관이 있다. 소위 '하비브 하우스'로도 불리는 미국 대사관저 옆에 위치한 서울 정동 10번지 중명전(重明殿)이 바로 그 건물이다. 지금은 경운궁(보통 '덕수궁'이라고 불리지만 그 이름은 고종이 강제 폐위되면서 일제에 의해 지어진 것인 만큼 원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해 앞으로 경운궁으로 부르기로 한다) 밖에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원래 이 건물도 경운궁의 궐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중명전과 경운궁 사이에 있는 미국 대사관저는 물론 영국 영사관 등도 경운궁 구역 내에 있었던 것이나, 서구 열강과 일제의 우리 궁궐 파괴가 심하던 시절 마치 사지가 절단되듯 떨어져 나가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원래 이름이 수옥헌(漱玉軒)이었던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맺어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여를 지내다가 경운궁으로 돌아와 기거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운궁 중건 공사를 하고 있던 1904년 4월 14일 갑자기 경운궁 함녕전에서부터 불길이 치솟더니 경운궁의 법전인 중화전은 물론 석어당과 즉조당 등이 모두 불타 버리게 된 것이다.


이에 왕은 다시 중건을 지시하면서 왕자와 함께 당시 경운궁의 서쪽에 있던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즉 고종이 중명전에 머물 당시 을사조약을 맺게 됨으로써 중명전은 의도하지 않게 그 비운의 현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이 중에 외세가 개입되지 않은 것은 과연 몇 개나 될까- 새문안길 경향신문사에서부터 경운궁 대한문 앞까지 이어지는 보도에는 이런 타일이 간간이 깔려 있다. 구 러시아 공사관 탑과 일제시대 법원을 거쳐 대한민국 법원이 거쳐 간 현 서울시립미술관, 경운궁 석조전 등이 보이는데, 이 중 외세의 입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가운데 고지도(古地圖) 정도가 아닐까.
이 중에 외세가 개입되지 않은 것은 과연 몇 개나 될까- 새문안길 경향신문사에서부터 경운궁 대한문 앞까지 이어지는 보도에는 이런 타일이 간간이 깔려 있다. 구 러시아 공사관 탑과 일제시대 법원을 거쳐 대한민국 법원이 거쳐 간 현 서울시립미술관, 경운궁 석조전 등이 보이는데, 이 중 외세의 입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가운데 고지도(古地圖) 정도가 아닐까.권기봉
불행은 홀로 오는 것이 아니라던가...

불행은 홀로 오는 것이 아니라던 선인의 말이 맞는 것인 지 1900년에 지어진 중명전은 을사조약말고도 대한제국 말기 우리 민족의 비운을 함께 했다.

일제의 어이없는 행태를 국제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1907년 은밀히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데 대해 미움을 산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고, 이후 순종은 이곳에 계속 기거하다가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왕이 거처를 옮기는 것을 의미함) 하게 된다.

또 1906년에는 순종의 비인 윤씨의 가례(왕의 결혼식)를 기념해 외국 사신들을 불러 축하연을 벌이기도 했고, 1915년 일제가 경운궁을 축소시키면서 외국인에게 임대해 1960년대까지 근 50년을 외국인들을 위한 사교 클럽인 '경성 구락부(Seoul Union)'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1968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 가족의 주택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정부에서 제공한 건물이 바로 이 중명전이요, 이후 지금까지 개인 기업의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는 곳이 바로 중명전이다.

그런데 개인 기업이 이 건물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보존 측면에 있어 많은 문제점이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소유주가 정부 기관이 아닌 일반 시민이니 개인 기업이 입주해 있는 데 대해 뭐라 말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다만 영친왕 내외가 귀국했을 때 정부에서 이 건물을 그들에게 양도해 소유주가 한때 이방자 여사였던 것을 보면, 이 건물의 구입과 보존은 정부의 의지문제이지 금전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건물 자체만 놓고 보자면 1925년의 화재나 개축 등으로 이미 바깥 부분을 제외하곤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지만, 이 건물은 일본의 조선 침략사에 있어 조선총독부에 버금가는 상징성을 지닌 건물일 뿐만 아니라 궁궐 내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아, 을사조약이여!-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중명전이다. 한때 고종과 순종이 머무르기도 했으나 외국인 사교클럽인 경성 구락부를 거쳐 현재는 개인 기업의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
아, 을사조약이여!-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중명전이다. 한때 고종과 순종이 머무르기도 했으나 외국인 사교클럽인 경성 구락부를 거쳐 현재는 개인 기업의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권기봉
요즈음에는 두 여중생이 사망한 지 시간도 많이 지나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연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집중되었기 때문일까. 두 여중생의 죽음과 관련해 보상금 액수가 다소 늘어났고 새로 부임한 미 2사단장이 경기도지사를 방문해 유감을 표명했다는 보도를 접했을 뿐이지, 다른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었다는 소식은 접한 바가 없다. 을사조약이 맺어졌던 중명전이 세태의 각박함에 피로를 느껴갈 때 우리는 '제2의 을사조약'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명전엔 어떻게 찾아가지?


은연 중 비운의 역사가 떠오르는 정동 경운궁 돌담길이지만 중명전 찾아가는 길은 정겹기만 하다. 단장을 마친 돌담길과 근처 구 대법원 건물에 새로 문을 연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극장 등 이름만 들어도 정겹게만 느껴지는 정동의 주인들이다.

중명전에 가기 위해서는 경운궁 대한문 쪽에서 출발하든 돌담길 반대쪽 출구인 새문안길 경향신문사·정동 스타식스 극장에서 시작하든 거리는 비슷하다. 어디서 출발하든 돌담길 중간쯤에 있는 분수대 앞에서 멈춰 서자. 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쪽은 경운궁, 돌담길 건너 서울시립미술관과 정동교회, 또 한 모퉁이에는 미국 대사관저가 있다.

중명전은 미국 대사관저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정동극장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된다. 골목을 들어가 얼마 안 되는 막다른 곳에 바로 중명전이 있는데, 골목 끝에 있는 데다가 개인 기업이 이용하고 있어서 그런지 조용하기만 한 중명전. 고요하기만 한 분위기에 중명전이 이겨내야 했던 그 애환이 느껴지는 듯하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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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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