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어른도 허여사 앞에선...

<문화유산답사33> 경남 함양 '허삼둘 가옥'을 찾아

등록 2002.09.11 19:22수정 2002.09.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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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길을 따라 허삼둘 가옥이 있는 경남 안의에는 유난히 돌담길이 많다. 시대가 지나면서 다소 규격화되고 콘크리트를 가미한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돌담길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곳이 몇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안의가 주는 매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 권기봉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지 4년. 우리는 대한민국이 일제 치하에서 광복한 이후 근 반세기를 한 정권 아래에서 살아왔다. 정당 이름이야 수시로 변해온 것이 대한민국이라지만, 기실 기득권을 잡고 있는 집단은 하나였다.

그러던 대한민국에 사상 최초로 만년 야당이 집권당으로 떠오른 지 4년. 우리는 이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변화를 맞았고 맞고 있다. 물론 말 그대로 정권만 바뀌었을 뿐이지 정작 기득권층은 그대로이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나마 정권 교체가 우리에게 가져온 변화는 결코 작지 않았다.

즉 아직까지도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이 존재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 등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인권 기구들이 닻을 올렸고, 각종 시민단체가 나서 모두가 한통속이었던 권력자 주변을 면밀히 감시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아직 미미하기는 하지만 벤처라는 이름으로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신종 기업들이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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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여사의 권위에 눌리다 ⓒ 권기봉

우리는 이미 이런 변혁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대변되는 사회 변혁을 겪으며 조선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제도적으로나마) 사라지고 노비 제도가 혁파되며 경제력에 따른 새로운 계급 질서가 암암리에 나타나게 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즉 누구든 '돈'만 있으면 할 수 없는 게 없었다.

집도 소위 잘 나가는 양반가문 대감댁처럼 으리으리하게 짓고 종도 부릴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관직을 사고 파는 사건까지도 일어났으니 말이다. 요즘 같아서야 적지 않은 부동산 갑부들이 사회적 책임은 망각한 채 자기 하나 잘 살자고 저지르는 일들 중 하나가 그런 것이라지만, 당시 양반과 상놈, 천민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사회질서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이와 같은 변화는, 어쩌면 신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신호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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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권세가 이리도 높소!" 사회적 책임감은 없고 다만 돈만 많은 요즘 사람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권세를 과시하듯, 허 여사와 윤대흥도 솟을대문을 유난히 높게 세워 권위를 드러내려는 듯하다. 인간의 허위의식은 시대가 따로 없는 것일까. ⓒ 권기봉

이와 같은 사회 변화 속에 각종 상업과 농업을 기반으로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상놈' 부자들이 부상하게 되는데, 허삼둘 가옥 역시 이런 현상과 맞물려 있다. 즉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당시 진양(晋陽) 갑부인 허씨 집안으로 장가를 가게 되는데, 윤대흥의 배우자 이름이 허삼둘이었다.

이제는 이 글을 읽는 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을 것이다. 집의 이름이 '윤대흥 가옥'이 아니라 '허삼둘 가옥'이라는 것을. 그랬다. 부잣집에 장가간 윤대흥은 아마도 집안에서 큰 실력을 발휘하지는 못했고, 경제력을 쥐고 있던 안주인 허삼둘이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민주공화국을 자처한다는 요즈음에도 불가능한 일, 즉 집 이름을 부인의 이름에서 따지 않았을까.

물론 2002년을 살아가는 사람의 상상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리 큰 오차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라면 절대적 유교사회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을 설명할 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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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맺힌 윤대흥의 삶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다만 집 이름도 그렇거니와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의 격차로 인해 윤대흥은 보이지 않는 설움 속에 살아가지 않았을까. 사진은 윤대흥이 거처했을 사랑채. ⓒ 권기봉

허삼둘 가옥이 갖는 특징은 원래 양반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지극히 현실 생활 중심적으로 지어졌다. 이를테면 바깥어른이 생활하는 사랑채가 크기는 크지만 그래도 당시 사대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독야청청'을 빼고 그 빈자리에 곳간이나 행랑채를 가깝게 연결해 불편함을 간소화했다.

또한 '허삼둘 여사'의 경제력이 보여주듯 안채의 모습이 상당히 고무적이다. 일단 크기부터도 사랑채나 다른 어떤 건물에 비해 클 뿐만 아니라 구조 역시 허 여사의 안목에 맞춘 듯한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바로 이 부분이 답사객들을 허삼둘 가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가 한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안채의 평면구조다. 안채는 대부분의 양반댁 안채처럼 'ㄱ'자형 모습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꺾이는 모서리 부분에 부엌이 들어가 있고, 앞쪽에서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냈다는 점이 바로 허삼둘 가옥의 매력이다.

특히 출입구 주위로 실생활에서 유용하도록 3단에 걸쳐 선반을 배치한 점이 다른 어떤 양반댁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다. 특히 부엌이 건물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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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권세를 누리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대변되는 사회 변혁을 겪으며 조선 사회는 새로운 부농 계급이 등장하는 등 급격한 변화의 길을 걷게 된다. 허삼둘 가옥에서도 조선 후기 부농들의 생활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한다. 사진은 허삼둘가옥의 안채. ⓒ 권기봉

물론 허삼둘과 윤대흥 부부도 돈은 많았지만 일종의 권력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한 듯하다. 마치 요즘 사람들이 돈을 가지면 으레 권력을 추구하듯. 직접 관직으로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집의 모양에서도 자신들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보수공사를 해 담장 높이를 높임으로써 이전보다는 그 느낌이 좀 덜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높이 구조된 솟을대문이나 요란하기만 한 창살과 창문들, 큼지막한 팔작지붕 등, 말로 하기에는 유치하고 무안했는지 이처럼 집을 한껏 호사스럽게 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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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둘가옥의 안채로, 여느 안채와는 다른 독특한 구조를 자랑한다. 즉 'ㄱ'자로 꺾이는 모서리 부분에 부엌을 들인 점이나, 앞쪽을 통해 바로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생활의 편의를 바탕으로 한 구성이 아닐까 한다. 특히 출입구 양옆의 선반이 이채롭다. ⓒ 권기봉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채소밭으로 쓰이고 있다는 허삼둘 가옥의 바깥마당을 보고 있노라면 씁쓸함이 스쳐간다. 한때 지역 갑부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결국은 폐가로 남아 있는 대저택.

돈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있지만 기득권층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설움을 집이라도 크게 지어 보상받아 보겠다는 심리. 이는 요즘 사람이나 80여 년 전 사람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시기를 전후로 사회 기득권층에 다소나마 균열의 조짐이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바로 이 시기에 일제에 의한 조선 강점이 시작되어 기득권 변화의 출발부터 차단 당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런 변화의 경험이 우리의 DNA 속에 녹아 있지 않을까. 그저 헛된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역사에서 너무나도 값진 경험이기에 그 아쉬움이 더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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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추장스런 것들일랑 모두 빼고 안채 부엌 출입구에는 사진에서와 같이 3단으로 선반을 만들어 놓아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게 했다.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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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지상낙원이 있네 안채 뒤편에는 사진에서와 같이 트여 있어, 날이 덥거나 할 때 바람을 쐬기에 좋게 만들어 놓았다. ⓒ 권기봉



'허 여사'의 자취를 느끼고 싶다면...

일단 경남 함양에서 안의로 가는 버스가 거의 30분 간격으로 있으니 함양을 거쳐 안의에 도착하기만 하면, 허삼둘 가옥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금천 옆 광풍루에서 잠시 땀을 식힌 뒤, 안의교 반대쪽 길을 따라 광풍루를 오른쪽에 끼고 약 100m 간 후 축협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자.

조금만 걸으면 이내 오른쪽으로 성당이 하나 보이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서서 50m를 조금 못되게 걸으면 왼쪽으로 채소밭과 함께 허 여사의 집이 보인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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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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