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공포증

사라져가는 재래시장을 아쉬워하며

등록 2002.10.12 14:57수정 2002.10.12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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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공포증>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게다가 백화점처럼 천장마저 높은 건물에 들어가면 늘 얼빠진 강아지처럼 넋을 놓고 멍해지곤 하였다. 높은 천장의 위압감에 현기증이 나는 데다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머릿속을 혼란하게 만들어, 갈 방향조차 가늠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또한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푸른 바다나 산정에서 바라보는 발 아래 먼 풍경들은 넓은 공간이지만 앞이 탁 트여 가슴이 시원해지는데 반해, 같은 넓은 공간이라도 광장이나 놀이공원 같은 곳에 가면 역시나 그 현기증과 멀미가 어김없이 일어나곤 하였다.

<광장공포증>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병 아닌 병은, 몸집이 작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거나 장롱과 벽 틈새로 숨기를 좋아했던 먼 유년시절의 습성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국민학교 일학년 때 교내동화구연대회에서 며칠 간 외운 동화를 단 한 줄도 발표하지 못하고 멍하니 강당 위에 서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사건이 시발점으로, 소심한 성격에 난생 처음 많은 대중들 앞에 섰기에 당황한 탓도 있었지만, 아마도 처음 접하는 강당의 높은 천장과 그 웅장한 공간으로 인해 넋을 놓게 만든 그 정체모를 두려움과 공포가 어른이 되고서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난 지금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점도 맛이 소문난 집보다는 조용한 집을 찾는다. 사람들과 만나서 교류하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대인관계가 남들보다 썩 원만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그 공포증은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지금도 가끔씩 백화점이나 천장이 높은 고층빌딩을 들어갈 때면 슬그머니 어린 시절의 그 쓰라린 기억이 떠올라 현기증을 느끼며 어지러워지곤 한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며 그들의 삶에서 나의 귀감을 삼으려는 노력을 계속하는 중이라 하지만, 또한 예전의 공포증은 많이 수그러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백화점 같은 곳은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대신 사람과 부대끼는 멋을 맛보고 사람 사는 모습을 직접 느끼고 싶을 때에는 재래시장을 찾는다. 재래시장들에서는 중압감을 주는 높은 천장도 없고 거부감 드는 대리석이나 고급 치장물들도 없고, 그저 질펀한 흙바닥 위에서 생선비린내와 오만가지 알록달록한 냄새들과 악다구니 쓰는 육자배기 같은 소리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이 많기에 예의 그 현기증을 조금 느낄 때도 있으나, 대개는 요리조리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미로찾기와 밀고 당기는 흥정소리, 서민들의 생기발랄한 발걸음과 오만가지 잡동사니 구경들의 잔 재미들이 옛 시골장터의 아련한 향수와 더불어 그 현기증을 묻어버리고, 그저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구나, 이게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던가 라는 생각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장터를 돌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어제는 볼일이 좀 있어 늦은 시간에 남대문시장통을 지나왔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오히려 좀 서운하다는 감이 들기까지 하면서, 붉은 전구 아래의 옷가게, 가방가게, 액세서리가게, 각종 노점상 들을 천천히 걸어다니며 구경하다 보니 오랜만에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노점 포장마차에서 족발에 소주라도 한 잔 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내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눈요기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점점 재래시장들이 줄어들고 있다. 재래시장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고층건물들이 차츰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기존 점포들도 리노베이션 등으로 현대식으로 탈바꿈하고 있어, 종래의 걸쭉한 재래시장들은 앞으로 점점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인다. 장사하시는 분들이나 손님의 입장에서는 좀더 쾌적한 환경에서 쇼핑을 하고 수익을 올리니 마다하지 못할 좋은 현상이나, 나로서는 섭섭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다.

재래시장들이 사라지고 나면, 이제는 거의 치유가 다 되어가는 나의 <광장공포증>이 다시 스물스물 고개를 들지는 않을려나 모르겠다.

시간이 나면 청계천 황학동벼룩시장이나 한 번 들러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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