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300m 고산에 오르다

<중국오지여행기 5>

등록 2002.10.14 15:00수정 2002.10.16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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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늦가을만큼 추운 날씨

13시간 동안 시달린 고물버스에서 내린 필자는 송판(松藩)에서 묵을 숙소를 찾아 나섰다. 6월말인데도 불구하고, 해발 2800m의 고산지대인데다 밤이어서인지 상당히 추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반바지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사람은 오직 필자 밖에 없었다. "완전히 늦가을 날씨이군. 빨리 숙소를 찾아야 할텐데…"하는 걱정을 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독일인 배낭족이 머물렀던 송판초대소가 어디 있는지 물어 보았다.

황롱으로 올라가는 산간도로에서 바라 본 송판의 한 티베트 마을.
황롱으로 올라가는 산간도로에서 바라 본 송판의 한 티베트 마을.모종혁
다행히 버스터미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초대소는 한국에 비유하면 여관급에 해당한다) 초대소 문을 제치고 들어가, 먼저 숙식비용을 확인했다. 역시 하루 60, 100, 180위안…. 만만찮은 액수였다. 꼭 방값을 흥정하라는 메모를 읽은 터라, 예상은 했지만 값이 너무 비쌌다. 최대한 웃는 낯으로 프런트의 여직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학생인데, 여기서 하룻밤 묵을까 합니다. 빈방은 있나요?" "물론이죠. 어떤 등급의 방을 원하시나요?" "2인 1실의 60위안짜리가 나을 듯한데요. 헌데 방값이 너무 비싼데, 좀 싸게 안되나요." "안됩니다. 이것은 현정부에서 정한 공식 가격이에요." "이전에 여기서 묵었던 서양 친구가 소개해줘서 왔어요. 그 친구 얘기로는 30위안까지 가능하다고 하던데…." 제법 상냥하게 대답을 하는 여직원과 한 차례 실랑이를 벌인 뒤 40위안으로 간신히 가격을 낮췄다.

초대소 쪽에서 요구하는 보증금 10위안을 더 낸 뒤 여직원 안내를 받아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정하게 됐다. 조금 오래된 듯한 건물에 깨끗하지 않은 침구며 화장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외국인이라 특별히 혼자 묵도록 한다는 말에 별다른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여직원은 뜨거운 물은 밤 9시부터 10시까지만 나오고, 내일 초대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보증금을 꼭 받고 나가라는 등의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한껏 피곤한 몸에 걱정 말라고 대답하며 침대에 몸을 뉘였다.


공짜로 타게 된 관광버스

6월23일 아침 일찍 일어나 초대소 프론트의 여직원을 찾았다. 황롱(黃龍)을 가기 위해서는 여행패키지 관광단 차량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직원에게 사정을 얘기하자, 마침 같은 초대소에는 청뚜에서 온 관광단이 묶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황롱으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한참 초대소 직원에게 탐문하던 중 한 키 작은 여성이 프론트로 다가왔다. 여직원은 그녀를 보고는 "바로 저 여자가 관광단 가이드"라고 알려주었다. 두터운 가을옷으로 한껏 중무장을 한 가이드는 쌀쌀한 아침 날씨에 반바지, 티셔츠만 입은 필자를 신기한 듯 살펴봤다. 잘 됐다 싶어 그녀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황롱까지 버스를 탈 수 있는가를 물었다. 물론 차비를 확실히 내겠다는 말과 함께.

추위에 떨며 호소하는(?) 필자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가이드는 "운전기사와 상의를 하겠으니 기다려라"고 말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객실 쪽으로 올라갔던 가이드는 잠시 후 밝은 표정으로 내려오면서, 운전기사가 승낙했다며 7시 반에 출발한다고 전해왔다. 차비가 얼마냐는 질문에, "좌석이 두어 군데 비어 있고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가는 것이니 낼 필요 없지만 황롱을 모두 본 뒤 우리와 같이 시간에 맞추어 나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황롱에서는 딱히 잘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터라,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공짜로 버스를 타게 됐네'를 외치며 속으로 콧노래를 불러댔다.(최근에는 송판지역의 호텔이나 초대소에서 알선한 차량을 이용해 다녀올 수 있다. 흥정을 잘 하면 왕복 100위안에 가능하다)

자연을 상처낸 산길

황롱 가는 산길의 해발 4,300m에서 찍은 구름바다. 2,800m에 위치한 송판에서 이 곳까지 도착하는데 2시간 반이 걸렸다.
황롱 가는 산길의 해발 4,300m에서 찍은 구름바다. 2,800m에 위치한 송판에서 이 곳까지 도착하는데 2시간 반이 걸렸다.모종혁
조금 늦게 일어난 관광객으로 인해 관광버스는 예정시간보다 10분 늦게 출발했다. 운전사까지 열 여덟 명이 탄 소형버스에 다른 사람 눈치가 보여 구석자리를 찾았지만, 가이드 지(季)양은 자신의 옆좌석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곤 예상치 않은 불청객에 호기심을 보이던 관광단원들에게 필자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유학생으로 이 먼 데까지 배낭여행을 왔는데, 황롱까지는 정식 교통편이 없어 우리와 같이 가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와 더불어 필자에게 자기 소개를 하라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만인이 쳐다보는 와중에 중국어를 하려니 말이 터지질 않았다. "시안(西安)에서 온 한국 유학생이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을 만나서 반갑고 오늘 하루 즐거운 여행을 같이 하길 희망한다"는 멘트를 간신히 끝냈다. 이어서 터지는 박수소리에 언제 중국에 왔느냐, 시안에서 무슨 공부를 하느냐, 노래 불러봐라….

더 이상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 급히 자리를 앉았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줄곧 해대는 질문에 대답을 하느라 곤혹을 치렀다. 그러는 와중 버스는 계속 가파른 산길을 내달렸다. 비포장된 거친 산간도로는 경사마저 급하다 보니, 몸을 제대로 중심 잡을 수 없었다.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며 처음 만난 중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필자에게 한 줄기 선명한 자국이 눈앞에 꽉 차왔다.

아름다운 산을 상처낸 산길의 긴 선이었다. 황롱까지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도로라지만, 곳곳에 심하게 파고 깎은 토사와 석재채취 흔적은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편안한 도로환경을 위해서라 해도 이렇게 훼손하면서까지 길을 낼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송판에서 황롱까지의 산길은 2001년 상반기에 전 구간이 정리되었다)

해발 4300m에 오르다

춥지 않느냐는 가이드의 질문을 미소로 대신하자, 그녀는 오늘은 날씨가 맑아 아름다운 고산의 운무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들려준다. 답답한 마음에 기분이 잠시 언짢았던 필자는 그 얘기를 들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지금 이쯤이 해발 몇 m정도 되는가" 묻자, 지양은 아마도 4000m에 가까울 거라며 "잠시 후면 가장 높은 슈에바오딩(雪寶頂) 밑까지 달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미 백두산보다 높고 한라산을 두 개 겹쳐놓은 것보다 높은 고지대에 왔단 말인가. '이상타. 이쯤이면 고산병을 느껴야 하는데 아무런 기색이 없네?' 익히 들어왔던 무시무시한 고산병의 증세가 어느 누구에게도 발생하지 않아 의문이 생겼다. 이에 관하여 지양에게 묻자,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고산병이란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갑자기 이동을 할 때에만 발병하죠. 우리처럼 차를 타고 해발 500m에서 천천히 지금 여기까지 왔을 경우 별 문제가 없어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경에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신체쇠약자나 연령이 많은 분들에게는 이와 같은 고산지대의 버스여행이 위험할 수 있어요. 공기가 희박해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일도 있으니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필자와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단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는 가이드의 말을 듣는 동안, 버스는 어느덧 줄곧 달린 가파른 오르막길을 끝내고 한 평지에서 멈추었다. "드디어 도착했네요. 여기가 해발 4300m 지점이에요." 이때 시간은 벌써 9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구름의 바다와 아름다운 산세는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황홀하기까지 했다.

송판에 서려 있는 티베트 이야기

1950년 10월 7일 고요한 여명을 깨고 칭하이(靑海)성, 쓰촨성 등지 접경에 집결한 수만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 침공을 개시한다. 이미 20여년동안 국민당과 일본 제국주의와의 기나긴 전쟁을 통해 단련된 백전노장 인민해방군은, 공산당 중앙으로부터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고산지대에서의 적응을 완벽히 끝마쳤다.

전략요충지 참도지역 공격을 개시로 물밀 듯이 진격한 인민해방군은 적은 병력에 제대로 된 무기마저 없던 티베트 보안군을 일시에 격파한다. 수도 라사(Lhasa)를 비롯하여 중국 영토의 1/4에 해당하는 거대한 티베트 영토 전지역을 중국이 점령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티베트는 그 이름도 시장장족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로 변한 채, 중국의 한 일부분으로 나라 잃은 설움을 톡톡히 당하고 있다.

현재 인도 북부 히말라야산맥 기슭에 위치한 다람살라에는 달라이 라마 14세를 정점으로 하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다. '작은 라사'라고 일컬어지는 이 곳에는 중국의 핍박을 피해 티베트에서 망명한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티베트의 언어, 역사, 종교, 문화 전반에 걸친 사회체계가 수립되어 있기도 하다.

행정·사법·입법 삼부 체제를 갖춘 망명정부는 철저한 민주집중제의 운영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들의 주요한 목적은 티베트의 독립과 티베트인 공동체의 유지·발전에 있다.

티베트 독립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망명정부가 발행하는 관련 자료에 따르면, 티베트의 면적은 220만 평방 킬로미터, 평균해발은 3400m, 인구는 1400만명(티베트인 600만, 중국인 800만)이다. 그런데 중국정부의 공식통계에는 면적 110만 평방 킬로미터에 인구는 240만명(티베트인 210만)으로 되어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찌하여 이런 통계상의 차이가 생겼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굴절된 현대사를 거슬러 살펴봐야 한다. 1950년 11월 티베트 전역을 석권한 중국은 거대한 티베트를 두 동강내서, 티베트인이 주로 사는 시장장족자치구와 시장(西藏)성으로 분리한다. 이것은 공산화 과정 중 줄곧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구호를 외쳤던 중국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당시 갓 성립된 옌비엔(延邊)조선족자치구 또한 오늘날과 다른 성급 행정지이었다.

허나 1954년부터 중국 내에서 촉발된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계기로 대소수민족정책은 큰 변화를 일으킨다. 당시 관변학계는 중국을 유구한 역사기간 동안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던 국가로, 민족의 주체는 곧 중화(中華)민족이라고 봤다. 이는 중화민족인 한족 이외에는 어느 소수민족도 고유한 통일국가를 형성할 민족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노동계급이 지도하고 노동동맹을 기반으로 한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소수민족의 존재를 인정치 않고 '모두가 하나의 울타리권에 사는' 중화민족 국가라는 애매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1954년 제정된 헌법을 계기로 변화한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다음 해 7월 전국인민대표회의는 시장성을 폐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비슷한 시기 옌비엔조선족자치구 또한 현급인 자치주로 강등 당한다. 시장성이 사라지면서 티베트는 자신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했는데, 참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가 한족 성으로 편입 당했기 때문이다. 북부와 서부지역의 대부분을 칭하이성, 쓰촨성, 윈난(雲南)성에 뺏기면서, 티베트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티베트 망명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통계에는 커다란 격차를 보이고 있다.

필자가 하룻밤을 묵은 송판은 바로 과거 중국 본토와 티베트간 영역을 나눈 국경의 관문이었다. 옛 명칭이 송주(松州)로 '쓰촨 서부의 관문'으로 불려왔던 송판의 원주민은 대부분 티베트인이었으나, 지금은 끊임없이 이주해온 한족과 비율이 엇비슷해졌다.

군사적 전략지로도 중요한 곳이기에 송판의 곳곳에는 고대에 축성한 성곽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송판고성인데, 이 성곽의 유래는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7세기 초 봉건 노예제사회로 분열되어 있던 티베트에는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영웅이 출현하였으니 바로 송첸간포(松贊干布)왕이었다. 영민하고 비전 있는 군주였던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 티베트를 통합하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국했다.

당시 티베트의 인접 국가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가기반 확립을 노린 송첸간포왕은 사신을 파견해 구혼을 한다. 하지만 파견한 사신이 당의 지방관에 의해 송주에서 억류당하자 송첸간포왕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군을 격파, 송주를 점령한다.

이에 분노한 당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군대를 파견하지만 줄곧 패배를 당하다가 간신히 되찾는 망신을 당한다. 티베트의 힘에 놀란 당 태종은 회유책으로 문성공주를 시집 보내게 되는데, 송첸간포왕이 그 일행을 맞이한 곳 또한 송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다. 문성공주를 맞이한 이후 티베트에는 종이 만드는 기술 등 중국문화가 전해지기 시작했고 불교가 전래되어 티베트 문자가 창달되기도 했다.

그 옛날 티베트와 중국 본토의 국경지역이었던 송판의 티베트인들은 급속한 한족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는 송첸간포왕의 침입 이후 중국측이 송판에 성곽을 짓고 둔전을 지으며 군대가 주둔하면서 비롯됐지만, 최근 들어 지우자이꺼우와 황롱이 관광명소로 개발되고 한족들의 이주물결이 잇달았기 때문이다.

송판 현중심지의 주민 대다수는 이미 한족으로 채워져 있고, 산간지역 또한 뚫리는 도로와 더불어 한족들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에 띈다. 필자가 작년 여름 송판을 찾았을 때 만난 약재판매점의 티베트 청년 롱중랑부(容中郞布·27)씨는 "송판과 황롱 일대 티베트 주민들의 생활양식은 이미 한족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그는 필자에게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다른 티베트인 거주지역과 달리 이 지역의 사람들의 중국어에 능한 편"이라며, "티베트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그나마 라마불교에 대한 신앙심 정도"라고 전했다.

긴 세월동안 한족의 군사 통치를 받은 때문인지, 오늘날 송판은 롱중랑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한족화된 티베트 마을 인상을 풍긴다. 늘어나는 한족 경영의 호텔들과 유흥업소, 사시사철 이어지는 한족 관광객들 덕분에 송판의 밤은 중국 여느 중소도시처럼 불야성을 이루기도 한다.

신비로운 종교생활 속에서 자연을 벗삼으며 살아온 송판의 티베트인을 변모시키는 한족의 물질문명. 필자가 처음 찾은 1997년보다 중국 본토화가 더 진전된 오늘날 송판의 모습 속에서, 한족 행정지로 귀속된 모든 티베트인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송판고성에 얽힌 송첸간포왕의 고사와 더불어 송판의 변화한 지금 모습은 필자를 많은 상념에 잠기게 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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