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거라, 지우자이꺼우!

중국오지여행기13

등록 2002.10.23 15:00수정 2002.10.3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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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우하이 지명에 얽힌 라마승 전설

눠르랑(諾日朗)은 티베트어로 위용스럽고 높고 크다는 뜻이다. 본래의 말뜻처럼 드넓게 이어진 눠르랑춴하이(群海)에서 큰 낙폭을 이루면서 깎아지른듯 잘라놓은 폭포는 지우자이꺼우 계곡을 진동시킬 만한 웅대한 물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약속된 일정에 따라 눠르랑을 떠나 슈정꺼우(樹正溝)에서 가장 큰 호수인 시니우하이(犀牛海)에 이르렀다. 전장이 2km에 달하고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18m인 시니우하이에는는 마침 수면에서 운무가 떠오르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운무가 바로 호수 위에 그림자로 각인되고, 이는 구름과 혼동되어 무엇이 하늘이고 호수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연의 조화에 넋을 놓고 있으려니 덩 스푸가 시니우하이에 대한 전설을 들려주었다.

"1천여년 전 중병에 걸린 한 티베트 라마승이 코뿔소(犀牛)를 타고 지우자이꺼우에 왔다. 지금의 호수에 이르러 갈증에 탄 목을 축이기 위해 호숫물을 마신 라마승은 돌연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밤낮 없이 물을 들이킨 라마승은 건강한 몸으로 지우자이꺼우를 떠나게 되었고 몰고 온 코뿔소를 호수에 빠뜨려 이 곳을 기념했다."

가는 곳마다 고대 티베트의 전설이 담겨져 있는 호수와 폭포, 원시림 등이 절묘하게 어울러진 비경은 시니우하이를 출발하여 라오후하이(老虎海)를 스치듯 지나 도달한 슈정폭포와 슈정춴하이에서는 주민들의 거주공간으로 바뀌었다.

폭 65m에 높이 15m인 슈정폭포는 지우자이꺼우 4대 폭포중 규모가 가장 작았다. 하지만 떨어지는 폭포의 형상은 물줄기가 살아 움직이듯 생동감이 넘쳤다. 마치 긴 줄기가 이어져 밑으로 쏜살같이 내려가는 흰 뱀처럼 물살은 빠르게 슈졍췬하이 방향으로 내달렸다.


측백나무 소나무 삼나무 등 푸른 나무숲과 3개의 호수는 사이사이 자리잡은 주민들의 경전각(轉經房) 방앗간(磨坊) 나무다리 등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자연에 순응하며 파묻혀 사는 티베트인의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지우자이꺼우 경내 폭포 중 폭이 가장 넓은 눠르랑폭포
지우자이꺼우 경내 폭포 중 폭이 가장 넓은 눠르랑폭포모종혁



"잘 있거라, 지우자이꺼우여!"

지우자이꺼우 경내 곳곳에 널려있는 중요한 비경들을 살펴보고 슈정자이에서 점심식사를 한 필자는, 덩 스푸가 계곡 입구까지 태워준 덕택에 오후 2시가 훨씬 넘어서 입장료 판매소에 도착했다. 이틀동안 렌트카 운전사 겸 가이드로 수고한 덩 스푸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정거장에 서있는지 얼마 되지 않아 송판(松藩)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차에 올라탄 뒤 조금씩 멀어지는 지우자이꺼우를 바라보며 마음 속에 무수히 복잡한 감흥이 떠올랐다. '언제 또다시 올 수 있으려나. 촉박한 일정에 짧은 만남만을 가지고 긴 이별을 하는구나. 부디 지금과 같은 선경을 영원토록 보존해 후세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다오.' 덜컹거리는 구닥다리 버스는 이런 감정을 달래주기라도 하는 듯 송판으로 힘차게 내달렸다.

6월 27일, 전날 저녁 일찍 송판초대소에 묵어 잠자리에 든 탓인지 아침 6시가 갓 넘어 눈이 떠졌다. 밤과 낮 15도 이상 일교차가 심한 고산지대에서 며칠을 머물러서인지 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을 찾는 당일 계획에 따라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초대소를 빠져 나와 바로 한 걸음에 찾아간 곳은 홍군(紅軍)장정기념비공원(이하 '장정공원')였다. 황롱·지우자이꺼우·루얼까이(若爾蓋)대초원으로 갈라지는 송판 사거리에 위치한 장정공원은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에게 의미가 깊은 사건인 '2만5천리의 대장정'을 기념한 장소이다.

1930년대 젊고 결의에 찬 공산주의자들이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앞세우며 중국 남부 장시(江西)소비에트를 중심으로 거대한 영역을 형성했다. 급격한 공산당의 세력 강화에 놀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정권은 수차례에 걸친 대공 토벌전을 전개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물줄기가 특징인 슈정폭포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물줄기가 특징인 슈정폭포모종혁


6000마일 대장정의 기록 전시한 장정공원

자기보다 10배에 달하는 병력과 최신 무기로 중무장한 국민당 군대를 네 번이나 격퇴했던 당시 공산당군대 홍군은 밀려드는 공세를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근거지 이동을 결정한다. 1934년 10월 16일, 장시성 위도우(雩都)에서 출발해 다음 해 10월 20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에 이르는 6000마일의 대장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극한상황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인내력을 시험했던 368일의 대장정기간 홍군은 235일을 주간행군으로, 18일을 야간행군으로 보냈다. 18개의 산맥(그 중 5개는 만년설에 뒤덮여 있다)과 12개의 성을 지나고 10개 지방토벌군의 포위를 돌파하기도 했다.

최후의 목적지였던 옌안에 도착했을 때 홍군의 병력은 처음 장정에 참여했던 9만명의 주력부대 중에서 단지 8천여 명만이 살아 남았을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허나 홍군이 점령했던 62개 도시와 마을에 뿌린 공산혁명의 열정과 씨앗은 이어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홍군은 대장정 기간 중 하루평균 114마일씩 행군하면서 한 차례이상 전선 어딘가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격렬한 전투와 험난한 지형을 지나기 위해 행군을 멈췄던 100일 중 56일은 쓰촨성 서북부지방에서 지냈는데,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원촨(汶川) 마오시엔(茂縣) 송판 루얼까이대초원으로 이어지는 코스에서였다.

특히 송판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유격부대와 조우한 홍군은 장정에서의 공과를 점검하면서 긴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장정공원인 것이다.

5위안의 입장료를 내고 공원 입구에 들어서니 한 인물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역전의 용사들과 고단한 대장정을 함께 하고 뒤에 중국 최고지도자에 등극했던 덩샤오핑(鄧小平)이 직접 쓴 현판이었다. 이어 들어간 공원내 진열관에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역사와 대장정의 과정을 입체적으로 정리한 자료들이 필자를 맞이했다.

1936년 옌안에서 마오쩌동과 함께 한 에드가 스노우
1936년 옌안에서 마오쩌동과 함께 한 에드가 스노우도서출판 두레


에드가 스노우와 가진 뜻밖의 조우

전시장 안에는 마오쩌동(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린빠오(林彪) 펑더화이(彭德懷) 덩샤오핑 등 중국 공산혁명의 주역들과 이름 모를 홍군 전사들의 다양한 사진이 진열되어 있었다. 1921년 공산당 창당부터 23년 제1차 국공합작, 27년 난창(南昌)봉기, 29년 장시소비에트 수립, 34년 대장정까지를 소개하는 희귀한 사진과 자료, 다양한 지도들.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까지의 기록물을 전시한 베이징의 중국혁명기념관과는 달리 장정공원은 오직 대장정에 초점을 맞춰 조성한 점이 이채로웠다.

평소 보기 힘든 자료를 살펴보고 있던 중 한 장의 사진이 필자의 눈을 붙잡았다. 한 외국인이 마오쩌동과 인터뷰하는 장면을 담은 것이었다. 밑에 달린 설명을 보니 '1936년 옌안에서 마오과 함께 한 아이더쟈·스눠(埃德加·斯諾)'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더쟈·스눠? 도대체 누구지?" 잠시 의문에 휩싸인 필자의 머리 위로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에드가 스노(Edgar Snow). 사진에 기재된 연도에 당시 바오안(保安)이라 불렸던 옌안에 들어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의 실체를 전세계에 최초로 보도했던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의 저자 스노우였다.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중국과 맺어졌던 과거의 인연이 떠올라 필자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유달리 조숙한 독서광이었던 필자는 한글 번역판이 처음 국내에 발간됐던 지난 86년 학교 앞 서점에서 이 책을 접했다. 갓 연합고사를 마친 중3의 어린 학생에게 '중국의 붉은 별'은 557쪽에 달하는 두터운 부피가 거북스럽지 않을 만큼 재미가 넘쳤다.

중국 고대소설 '수호전'이 그렸던 양산박의 영웅들을 연상케 하는 공산당 지도자들의 활약상과 공산혁명에 몸을 받친 무명용사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1주일동안이나 필자를 책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뒤 접한 장정공원의 자료들은 바로 '중국의 붉은 별'에서도 하이라이트로 묘사했던 장면들을 사진으로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필자가 지나왔던 청뚜에서 송판에 이르는 길이 그 옛날 홍군이 걸었던 장정로라는 사실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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