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 생태주의자가 연 '숨길'

이안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

등록 2002.11.03 02:54수정 2002.11.1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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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시인의 첫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실천문학사)에는 살면서 하찮게 넘길 만한 물질들-하지만 조물주에 의해 만져지고 소중하게 가꿔진 것들-이 소박하게 상차림돼 있다. 여기에 팍팍하기만한 일상사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굴곡지게 소화해내는 그만의 삶의 방식이 투영돼 있다.

1999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우주적 비관주의자의 몽상' 외 4편의 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안 시인은 들판의 풀 한 포기에도 생명력을 부여하는 독특한 눈을 갖고 있다.


꽃, 풀, 콩 등 농촌 어휘들이 그의 시 전반에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시집 알맹이를 뭉텅뭉텅 잘라내고 겉만 쭉 훑는다면 평범한 농촌시라는 느낌에서 그칠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시는 만만치 않은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시집 첫 장을 장식한 '숨길1'은 시집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숨길'같은 시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천둥 번개 지나간 곡우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쳐 살아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숨길1' 전문


'곡우'(穀雨, 24절기의 하나. 4월20일경) 아침에 '우박'과 '꽃잎'이 만난다. 우박은 꽃잎을 깨우는데 또 꽃잎은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는다. 우박과 꽃잎의 때아닌 만남이란 설정도 재밌지만 그 만남을 자연의 오묘한 조화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눈은 신비롭다. '잘못 든 길'을 알면서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진'다니.


이안 시인은 과거의 절망도, 지금의 어긋난 자화상도 아프게 껴안는다. 하지만 그 아픔은 정겨워 보이고 애틋한 느낌을 준다. 그는 '내가 지운 꽃들과 / 나를 버린 꽃들을 / 한 세월의 자옥한 / 연기 속에서 달래어주며 (..) / 그 속, 속에 깃들인 눈물을 / 사랑이라 쓰겠네, 가슴에 맺힌 멍이 불현듯 / 꽃이 되진 않을까?'라고 자신을 지탱해온 시작(詩作)과 가족사에 대한 주름을 보듬는다. 그러면서 그는 '아내여, / 불에도 사는 꽃이 아니면 / 차리리 요절'이라는 의지를 심어놓는다.

생명의 탄생은 환희이면서 동시에 고통인데 이안 시인은 이 찰나를 절묘하게 포착해낸다. 때론 자주 등장하는 농경어가 지루하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의 언어는 농경어에 대한 천착을 바닥에 깔면서도 하늘, 바람, 꽃, 나무 등 자연어의 직렬과 병렬이 엮어내는 자기장을 빚어낸다. 이 속에서 작렬하는 어긋날 것만 같은 비유와 상상의 아슬한 줄타기가 <목마른 우물의 날들> 전반에 펼쳐진다.

일상은 늘 기름칠을 해놓은 톱니바퀴처럼 잘도 돌아간다. 때론 역풍과 갖은 풍문에도 잡스런 모리배들은 여전히 판을 친다. 이런 지긋한 일상을 완벽하게 단번에 엎어놓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상상의 전복은 자유다. 이 대열에 날씬한 이안 시인의 시집 한 권이 벗이 돼주리란 희망을 가져본다.

덧붙이는 글 | 이안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녹색평론'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디딘 후, 이듬해 '실천문학'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을 하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이안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건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녹색평론'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디딘 후, 이듬해 '실천문학'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을 하기 시작했다.

목마른 우물의 날들

이안 지음,
실천문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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