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축제 뒷날인 토요일 오후, 고단한 몸을 좀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예정된 일정이라 어쩔 수 없이 연수차 화순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차 속에서나마 잠시 눈을 붙이려고 뒷좌석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는데 동승하신 시내 인문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려왔습니다.
"어제 학교 운영위를 했는데 아침 11시에 들어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학교 운영위라는 게 학교장 하는 일을 합리화시켜 주는 기구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논쟁적인 사안이라도 있었습니까?"
"학부모들이야 어디 자기 의사를 말하기나 합니까? 제가 논쟁거리를 만든 거죠."
그 논쟁거리란 다름 아닌 겨울방학 중 보충자율학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11월인데 벌써부터 극성이구나 싶기도 했지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어서 잠시나마 눈을 붙여주기를 원하는 몸의 간절한 요청이 더 급하여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누군가의 입에서 발음된 180시간이라는 숫자에 그만 잠이 확 깨고 말았습니다.
"180시간이라면 도대체 계산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숫자개념이 약한 저로서는 계산이 잘 되지 않아 물었던 것인데 그 대답도 얼른 듣기에는 무슨 수수께끼만 같았습니다.
"삼육은 십팔 아닙니까?"
하루 6시간에 30일이면 180시간이 딱 떨어지는 그 간단한 구구법을 저는 낡은 형광등에 불이 켜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의자에서 등을 떼면서 이렇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겨울 방학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거기에 자율학습을 밤 10시까지 하자는 것을 오후 6시까지만 하자고 하는데도 학교장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자율학습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부모가 요청을 해오는 경우는 자율학습을 빼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율학습비는 다 내야합니다. 무조건 백 프로 완납을 해야하니까요."
"그래도 학부모들이 불평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고마워하는데요."
학부모가 학교에 전화를 걸어 자녀의 자율학습을 빼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는 하나같이 그 이유가 학원수강 때문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방과후 여가 시간을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사용하고자 하는 자녀의 의견을 존중하여 담임교사에게 말씀드리는 경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대답이 이랬습니다.
"요즘 그런 의식 있는 학부모가 어딨습니까?"
그런 대화가 오고 간 뒤로 저는 잠을 청하기는커녕 안락하고 푹신한 의자에서 등을 뗀 불편한 자세로 화순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야만의 시대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보충자율학습에 관한 대화가 이어지다가 두 분 선생님이 이런 우스개 소리를 주고받는 것이 귀에 들렸습니다.
"자율학습에서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율이지요."
"그럼 보충수업에서 없는 것은?"
"보충이지요."
자율학습에서 자율이 없다는 것은 일종의 '패러독스'입니다. 그것은 어떤 허구나 허위의 내막을 극명하게 드러내는데 사용되는 문학적 수사법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런 역설의 표현은 사용하는 단어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에서는 전혀 효과를 거둘 수 없게 됩니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자율이란 단어가 바로 그 단적인 예입니다. 자율이라는 단어가 이미 타율의 기능으로 쓰여지고 있는 형국이어서 모처럼 웃자고 던진 말도 썰렁한 농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보충수업은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통해서 일정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배려해주는 수업입니다. 인간 능력의 개인차나 가정환경 등으로 인해 성적이 뒤처진 아이들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한 인간교육의 일환이요, 사회 불평등 구조를 다소나마 완화하기 위한 조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교사회에서 이런 배려에 따른 보충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보충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가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우리 교육의 모순이요 비극입니다.
보충수업은 방과후나 방학을 이용하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는 방과후가 없습니다. 물론 방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방과후나 방학에도 정상수업이나 다름없는 불법 보충수업이 밤늦게까지 전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도한 수업에 밀려 부진아들의 성적은 갈수록 바닥을 헤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식이니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더욱 심화되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도 평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학생들의 개인차를 운운합니다.
얼마 전 교육인적자원부가 초등학교 3학년 전집 진단평가를 하겠다고 하는 것을 전교조가 반대하고 나선 적이 있습니다. 진단평가란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진단하여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한 학생들에게 일정 수준에 이르도록 보충해주려는 의도로 실시하는 시험입니다. 그런데도 전교조가 이를 반대한 것은 그 목적이 진정한 '보충'이 아닌 '서열화'로 전도된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교사에게 가장 힘든 학생은 공부를 잘 못하거나 일탈행동이 잦은 학생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반성을 할 줄 모르는 학생입니다. 반성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학생입니다. 다행히도 그런 아이들은 교사의 오랜 사랑과 노력으로 치유가 가능합니다.
문제는 반성하지 않는 교육관료들입니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이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하나 뿐인 목숨을 버렸지만 그 어린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어른들입니다. 가슴아픈 것은 거기에 우리 교사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제자 사랑을 앞세워서 말입니다.
자율학습에 없는 것은 자율이고, 보충수업에 없는 것은 보충이라는 말을 교육관료들이 듣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합니다. 언어를 왜곡시킨 장본인들이라 별 표정이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최고 학부인 대학을 나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교육에 대한 철학과 고민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텐데 작은 마음의 동요라고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상당수의 학생들이 다시 학원으로 가고, 더러는 독서실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학부모는 경제적인 부담이 늘어나고 학생들은 수면시간이 줄어들어 건강을 해치고 있지만 이에 대하여 시정을 요구하거나 정당한 자기 주장을 하는 학부모나 학생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율적으로 희망자에 한해서 하게 되어 있는 보충자율학습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애가 요즘 가만 보니 무엇이든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고 대화를 해보니까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해도 어차피 들어주지 않으니까 아예 마음으로 포기하고 살아온 겁니다. 저도 솔직히 강요를 좀 하는 편이거든요. 물론 아이를 위해서 그랬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을 알았어요. 나중에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더라고 일단은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서로 대화를 해야겠더라고요. 이번 겨울방학에도 정말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보충수업이나 자율학습을 빼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옆 좌석의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서 저는 마음이 뭉클해지고 하고, 한편으로는 한없이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식은 죽 먹듯이 쉽게 처리해야할 일을 무슨 큰 일을 도모하는 것처럼 해야만 하는 이런 코미디 같은 비이성적인 야만의 시대가 언제나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인지 착잡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정말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건강한 마음의 상태에서 얻어진 결론이라면 그 사실을 부모가 대신 말해주기 전에 자녀가 직접 담임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자기 의사를 상대방에게 정중하게 전달하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일들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교육'이요,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의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욱이 시기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워 가는 노정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지각 있는 부모의 배려는 자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녀들에게 거부할 것은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웃어른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아주 공손하고 이성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아이들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학교 교육으로 인해 그들은 반사회적인, 사랑 없는 인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권의 사각지대가 되어버린 학교 사회에 대한 두려움(아! 교사로서 정말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때문에 내 아이를 당당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이해가 되긴 합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학부모로서의 자기 주장을 당당하게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지각 있는 학부형들의 당당한 자기 발언이 전제되지 않는 교육개혁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제자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교육정상화를 외치며 자율학습비 수령을 거부하는 양심교사들을 오히려 매도하는 교육관료들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어린 한 생명을 앗아가고도 학교는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뜻 있는 학부모들이 나서야할 때입니다. 이미 마음이 화석화된 교육관료들의 반성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그것이 우리 교육의 해묵은 난제를 풀어가는 좀 더 빠르고 올바른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입시교육에 영혼을 빼앗긴 자녀들을, 그들의 불행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