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식> 표지책세상
빅터는 섹스 중독자이자 다른 사람들의 단조로운 일상을 자극하는 사기꾼이다. 그는 세상을 혼란시켰던 어머니 맨시니 부인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초기 식민지 미국을 재현한 관광지에서 일한다. 어릴 적부터 세상에 진실이란 없다고 조기교육을 받은 탓인지 주인공의 시각은 항상 삐딱하다. 소년은 엄마로부터 안전하고 조직적인 세상 속에 내포된 위험과 세상을 혼란시키는 법을 배웠다. 그 혼란은 혼란을 위한 혼란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혼란이다.
“사람들은 안전하고 조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애써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 세계가 얼마나 지루할지는 깨닫지 못했다. 온 세상에 재산이 나눠지고, 속도가 제한되고, 지역이 구분되고, 세금이 매겨지고, 규칙이 생기고, 모든 사람이 시험받고, 등록되고, 번지가 매겨지고, 기록된다. 모험을 위한 자리는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밖에 없다. 롤러 코스터 위에서. 영화관에서. 하지만 그것들은 거짓 흥분에 불과하다. 공룡들은 아이들을 잡아먹지 않고, 시험 청중은 커다란 가짜 재난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재난, 가능성이 없으니, 진짜 구원의 기회도 아예 없어진 진짜 충천한 의기. 진짜 흥분. 환희. 발견. 창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법들, 이 법들은 우리를 권태에 빠뜨린다. 진정한 대혼란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더 나빠질 수 있을 때에 더 나아질 수 있다”(196~197쪽).
하지만 파괴와 혼란을 통한 창조는 <파이트 클럽>과 조금 다르다. 조금은 허무한 색채를 띄고 있다. 맨시니 부인은 얘기한다.
“압박하는 건 뭔가를 창조하는 것과는 다르지…반항은 재건이 아니야. 조소는 대체가 아니고…우리는 세상을 부숴버렸어. 하지만 그 산산조각 난 파편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다.…우리 세대가 아무리 세상을 비웃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아. 우린 남들이 창조해 낸 것들을 심판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렸어. 정작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으면서 말이야.…난 세상에 그 어떤 가치있는 일도 해주지 않았어”(140쪽). 맨시니 부인의 독백은 마치 지나간 서구 68세대, 한국 386세대 내에 존재했던 잘못된 편향을 드러내는 듯하다. 사회를 뿌리째 흔들었지만 뭔가를 심을 줄 몰랐던, 새로운 뿌리내림을 고민하지 않았던, 어느 순간 비판하던 대상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빅터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그는 자존심과 자신감을 상실한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려 한다. 그는 자신을 내던져서 다른 사람들을 ‘영웅’과 ‘구세주’로 만든다. 빅터는 식당에서 음식물이 목구멍에 걸려 질식한 사람의 흉내를 내서 누군가가 자신을 구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는 사람들의 단조로운 일상을 자극하고 영웅을 창조한다. 그리고 자신을 살림으로써 영웅시되고 자긍심을 얻은 사람들의 동정으로, 그들이 보내주는 얼마간의 돈으로 어머니를 부양한다.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다. 나는 엄마를 먹여 살린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66쪽).
일방적인 도움은 아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 빅터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항상 핍박받는 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수표를 보낼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러니 항상 가난해야 한다. ‘자선’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는 않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나는 그들의 용기의 증거이다. 그들이 영웅이었다는 증거. 그들의 성공의 증거”(67쪽). “그저 나약하고 굴욕적인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 그저 평생 사람들에게 이 말만 하면 된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71쪽). 새로운 상부상조(相扶相助) 정신의 출현.
혼란의 소용돌이가 멈추는 곳은 깊은 심연이다. 그 모든 혼란이 멈추자, 아니 그 혼란이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리자 빅터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 역사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써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판단하는 것이다.
“돌과 혼란으로 세상을 일으키려고 애쓰고 있다. 뭐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그렇게 바둥거리며 살아왔건만 결국 우리가 도착한 곳은 깊은 밤의 어느 외딴 곳이다. 어쩌면 아는 것만이 해답은 아닐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어둠 속의 폐허에서 우리가 짓고 있는 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355쪽).
혼란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 불순한 혼란 속에서 순수한 창조가 나타난다. 불순함과 순수함, 혼란과 창조의 틈은 그리 넓지 않고, 그 경계 자체가 인위적인 것일 수 있다. 소설 <질식>은 숨막히는 세상 속에서 질식되지 않고 살아가려는, 자신의 질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숨통을 터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질식>의 엽기적인 테러
- 염색약 내용물을 뒤바꿔놓는 ‘미용산업 테러리즘’
- 가짜 무료쿠폰이나 할인쿠폰을 우편으로 발송해서 유통질서를 어지럽히기
- 당신의 섹스 상대가 전염병에 걸렸으니 주의하라는 편지를 발송해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
- “파업을 일으키겠어. 이제부터는 여자들한테 자기 문은 자기가 열라고 해. 자기들이 먹은 저녁 값도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겠어. 무거운 소파를 옮겨주지도 않을 거야. 꽉 잠긴 병 뚜껑도 열어주지 않을 거야. 볼일 보고 나서 변기 뚜껑을 내려놓는 배려는 기대하지도 말라 그래. 아니, 이제부터는 아예 변기 뚜껑 위에 실례를 해야겠어…나 없이도 자기들끼리 잘 사는지 한번 보자고. 남자 없이 그들만의 작은 세상이 돌아가기나 하는지 어디 두고보는 거야.…그리고 침몰하는 배에서도 내가 가장 먼저 구명 보트에 올라탈 거야. 여자들은 필요 없어. 섹스 상대라면 다른 것들도 얼마든지 있어. 그냥 섹스 중독자 모임에 나가서 필기만 잘하면 돼. 전자레인지로 데운 수박이 있잖아. 잔디 깎는 기계의 부르르 떨리는 핸들도 있지”(251쪽).
질식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책세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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