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폴에서 만난 죽음의 신 '칼리'

리틀인디아 힌두교 사원을 가다

등록 2002.11.19 19:17수정 2002.12.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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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신 칼리 ⓒ 홍경선

몇 달 전 10대 소녀 두 명과 함께 투신자살한 30대 남자의 지갑 속에서 한 사진이 나왔다. 10개의 머리에 10개의 손 그리고 10개의 다리... 붉은 혓바닥을 늘어뜨린 채 조각난 인간의 육신을 두르고 피를 받고 있는 엽기스런 모습이었다.

신문에 난 사진 속의 주인공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싱가폴의 한 힌두교사원 안에 모셔져 있던 죽음의 신 '칼리(Kali)'의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힌두교의 3대 주신 중에 하나인 파괴신 '시바(Siva)'의 부인이자, 죽음의 여신 칼리(Kali). 경찰조사에 따르면 그 30대 남자는 함께 투신한 10대 소녀 두 명에게 죽음의 유혹을 가르쳤다 한다. 이름하여 '칼리숭배' 세 명의 고귀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어긋난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칼리(kali). 그녀를 만난 곳은 '그린 & 크린 시티'로 불리우는 머라이언의 나라 싱가폴이었다.

싱가폴은 14세기경에 수마트라 섬의 한 왕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상한 동물을 보고 사자로 오인하면서 '싱가푸라(사자의 도시)'라는 뜻으로 불리워지다가 영국인들이 싱가포르로 발음하면서 오늘에 이른 나라이다. 인구 3백만명의 조그만 나라 싱가폴은 동남아 최대의 무역, 금융, 관광의 중심지로 동남아의 쇼윈도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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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의 상징 '멀라인언' ⓒ 홍경선

하지만 깨끗한 도시의 대명사 수도 싱가포르에 있는 리틀인디아는 싱가폴이 가지고 있는 그린&크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지저분한 옐로우풍의 거리, 항상 사람들로 가득찬 시장, 여기저기서 풍겨나오는 카레 냄새... 그곳은 싱가폴 인구의 7.1%를 차지하고 있는 인도인 거리였다. 리틀인디아는 정말 인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거리였다. 인도까지 가지 않아도 싱가폴에서 인도의 문화와 종교 축제 등을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 대부분이 힌두교를 믿고 있는 이곳은 독특한 카레냄새 뿐만 아니라 만화 속에서나 봄직한 다양한 모양의 조각들이 붙어있는 힌두교사원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겨울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무작정 걷기 시작한 리틀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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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사원의 외관 ⓒ 홍경선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을 파는 재래시장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커다란 힌두사원이 하나 나타났다. 리틀인디아 최대의 힌두교 사원이라는 '스리마리아만 사원'. 시바, 비슈누, 브라흐마, 크리슈나 등 다양한 힌두교 신들을 화려하게 조각해 놓은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독특해 보이는 사원이었다. 자욱한 연기와 나지막한 기도소리가 새어나오는 입구로 들어가자 낯선 힌두교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딸랑 녹색 천 하나만 허리춤에 두른 채 신도들에게 하얀 분가루를 발라주는 제사장, 이마 한가운데에 금빛 연지를 찍은 신도들. 모두가 낯설어 보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마침 그날 따라 힌두교 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사원 안의 사람들도 역시 낯선 눈으로 한국에선 온 이방인을 맞이해 주었다. 무거운 배낭을 한쪽 켠에 놓아둔 뒤 어릴적 일본 에니메이션 '공작왕'에서 보았던 다양한 힌두신들이 모셔져 있는 사원 곳곳을 둘러다 보았다. 원숭이 대장 하누만이 지키고 있는 '라마' 사원을 비롯하여 창조신 '브라흐마', 유지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를 모시고 있는 사원 등 곳곳마다 향을 피우며 기도를 드리는 신도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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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사원앞의 제사장과 신도들 ⓒ 홍경선

본당을 나와 뒤쪽으로 돌아섰을까? 바로 그때 기괴한 모습의 신이 나타났다. 얼핏 보면 불교의 천수관음보살처럼 얼굴과 손발이 많은 모습이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10면 10수 10족에 붉은 혓바닥이 천녀유혼에 나오는 나무귀신처럼 길게 늘어져 있고 각 손마다 칼, 지팡이, 종, 아기 등이 쥐어진 모습이었다. 특히 무릎팍에는 제물로 바쳐진 한 여성이 축 늘어져 있었고 기다란 촉수 몇 가닥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모습은 그 어떤 괴기영화도 흉내낼 수 없었던 엽기적인 모습이었다. 낯선 충격에 잠시 뒷걸음질친 채 그 앞에서 기도를 드리던 한 신도에게 정체를 물었다. 붉은 혓바닥의 주인공은 바로 죽음의 여신 '칼리'. 그녀를 본 순간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파괴의 신 '시바'의 부인이자 코끼리신 '가네샤'의 어머니, 죽음을 다스리는 공포의 여신 '칼리' 앞에 그토록 많은 신도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피를 받는 공포의 여신 앞에 엎드려 생명의 축복을 받고자 어린아이를 눕혀놓고 기도하는 신도들의 모습. 그들은 낯선 이방인의 충격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와 같은 칼리숭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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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파괴신 시바, 코끼리신 가네샤, 생명의 신 칼리 ⓒ 홍경선

힌두교식 세계관은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을 거듭하는 윤회라 한다. 돌고 도는 세계관, 이같은 윤회사상에서 칼리는 죽음의 신인 동시에 새로운 생성 즉 생명과 양육의 신인 것이다. 또한 길게 늘어뜨린 붉은 혓바닥이며 칼을 들고 피를 받고 있는 혐오스런 모습은 악(惡)을 물리치는 '벽사'용이기에 칼리는 수호의 신도 된다. 죽음의 신이 곧 생명과 수호의 여신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힌두교의 정신세계인 것이다. 이처럼 칼리숭배사상의 본질은 생명과 수호에 있다.

하지만 몇 달 전 동반자살한 30대 남자와 함께 투신한 10대 소녀 두 명은 칼리의 겉모습만 보고 그 속에 담긴 힌두교의 정신세계를 알지 못했다. 힌두사상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비극은 세 명의 고귀한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싱가폴에서 만난 죽음의 여신 '칼리'. 그녀는 그렇게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내 기억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곧 사라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일보 대학생온라인신문 지키(www.zkey.co.kr)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일보 대학생온라인신문 지키(www.zkey.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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