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새들이 어디서 오느냐고 묻거든

[자연기행] 순천만 갈대밭을 가다

등록 2002.11.19 23:35수정 2002.11.2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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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신발도 바지도 온통 뻘 투성이입니다. 그렇게 되는 데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지요. 알고도 그리 된 것이니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좋다는 곰소의 뻘도, 강화의 갯벌도 이렇게까지 곱게 반짝이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 통에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절로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만 뭐 이것도 좋습니다. 우리나라 갯벌 중에서 깨끗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순천만 갯벌에 신발이, 양말이, 바짓가랑이가, 카메라 가방이, 세탁소에서 갓 찾아온 외투 좀 버린다 해서 무에 그리 슬픈 일이겠습니까.


눈앞에 펼쳐진 17만 평 갈대밭을 내 발로 밟지 않고 눈으로만 훑고 돌아올 자신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방죽 위 길을 편하게 걸으면서 감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만, 그러기엔 끝이 보이지 않는 갯벌이, 바람에 하얀 꽃 흔들며 선 갈대밭이 넘치게 유혹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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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이 곳 순천만 대대동 포구가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덕분에 여천반도와 고흥반도를 양쪽에 낀 이 깨끗한 갯벌은 오래도록 제 모습을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어른 키높이까지 오는 갈대들은 철새들이 보금자리를 꾸미기에 손색이 없고, 갯벌은 170종이 넘는다는 철새 손님들을 다 품고도 넉넉함을 잃지 않습니다.

호수처럼 평안한 바다 위에는 대대동 어민들이 띄워 놓은 배들이 나른하게 졸고 있네요. 이 평화로운 풍경 앞에 철새들도 마음을 놓을 밖에요. 호주에서 시베리아로 가는 도요물떼새들도 쉬어가고, 천연기념물 228호인 흑두루미가 겨울을 나는 곳도 이 곳입니다. 노랑부리백로, 저어새, 황새, 재두루미, 검은머리물떼새……. 이름도 고운 새들이 순천만을 잊지도 않고 해마다 찾아온다고 합니다.

철새들이 많이 오기로야 주남저수지를, 창녕의 우포늪을 따라갈 수야 있겠습니까만 이 곳의 갈대와 새가 어우러지는 풍경은 다른 곳들이 주지 못하는 풍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곳에는 새들이 숨기 좋아하는 칠면초 군락이 있어서 그 빛이 또한 특별히 곱습니다. 해류가 느리게 움직이는 갯벌 상부에 넓게 퍼지는 칠면초는 일곱 가지 색깔을 가졌다 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빨갛게 타오르는 칠면초가 갈대 줄기와 빚어내는 화음은 눈을 한없이 즐겁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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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순천만을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장어지요.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간판도 없는 허름한 밥집에 앉아 장어구이를 시켰습니다. 저야 먹지 못하지만 함께 간 사람까지 저 때문에 그 맛있다는 순천의 장어구이를 먹지 못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찌개류는 아예 차림판에 있지도 않습니다.

"맛있다니까. 다른 아가씨들도 다 잘 먹는데, 먹어 봐. 먹어 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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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장어집 할머니는 막무가내, 저는 속수무책입니다. 나는 장어를 먹을 줄 모르니 밥부터 달라 해도 달라는 밥은 주시지 않고 양념이 맛있게 발라졌으니 먹어 보라고, 일단 먹어 보면 맘이 바뀐다고 숫제 상 옆을 떠나지 않을 기세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이 음식을 입으로 먹으려 들지 않고, 머리로 먹으려 들기 때문에 못 먹는 음식이 생기는 법이라 했습니다. 굴도 못 먹고, 회도 즐기지 않는데다 해물이라곤 오징어나 새우, 게 따위나 겨우 먹을 줄 아는 산골 출신의 촌스런 입맛으로는 그 고급(?) 음식을 맘껏 즐기는 일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맛있다고, 도시 장어와 차원이 다르다고 감동하며 먹는 모습을 젓가락 빨며 바라볼 밖에요. 정성껏 만들어주신 것, 맛나게 먹어 드리지 못해 할머니께 죄송했습니다.

밥을 먹고 나오니 해가 지려고 하네요. 긴 방죽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세워 놓고 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곳의 일몰이 황홀하게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던 겁니다. 갈대꽃이 하얗게 피는 이맘때, 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했습니다.

해 지기를 기다렸던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지요. 낮 동안 먹이를 구하러 나갔던 철새들이 보금자리를 찾아 포구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몇 마리씩, 때로는 수십 마리가 일몰과 더불어 불타오르는 하늘을 날아오는 광경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요. 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사진 속에 담긴 것은 감동의 일부라도 붙들어 보겠다고 발버둥친 흔적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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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저 새들은 어디서 오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세상 저 끝에서 온다고 말해주었다.

저렇게 떼지어 어디 가는 거냐고 또 물었다
세상 저 끝으로 간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어디가 세상 끝이냐고, 이번엔 정색하고 올려다본다
잠깐 궁리 끝, 기러기 내려앉는 곳이겠지, 하고 둘러댔다.

호숫가 외딴 오두막 가까이 키보다 높은 갈대들
손 저어 쉬어 가라고 기러기 부르는 곳
저녁 막 먹고 나란히 서서 고개 젖혀 하늘 보며
밭고랑에 오줌발 쏘던 깊은 겨울.

- 이면우 <기러기>


이면우는 '기러기'라는 시에서 새들을 보며 아들과 나눈 대화를 이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순천만 하늘을 까맣게 날아가던 새들도 그렇게 세상의 끝에서 끝으로 날아가고 또 날아오는 것이겠다 싶었지요.

붉게 타오르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죽 서 있는 사람들의 풍경 또한 아름다웠습니다. 일몰의 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갈까 걱정하는 여자 친구에게, "괜찮아, 이번에 제대로 못 보면 다음에 또 오면 되는 건데, 그렇게 안달할 거 없잖아"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도 순천만에는 있더군요. 마음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저는 철새와 갈대밭과 해 지는 서쪽 하늘을 두고 돌아오는 일이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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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버스 정류장에서 순천역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뻘투성이 옷차림새를 본 한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뻘에 들어갔다 왔나 보네? 간 김에 장어나 좀 잡지." 저도 마주 웃어 드렸지요. 그러게요, 그 비싼 장어가 지천으로 널렸단 걸 알았으면 어찌 한 번 본격적으로 일을 벌여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이 곳 아낙들이 꼬막을 캘 때 뻘배를 타고 먼 수평선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아저씨의 웃음 속에 묻으며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새들도 잠자리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저도 고개를 누인 채 집으로 향하는 기차의 덜컹거림에 몸을 실었습니다. 불타 오르던 서쪽 하늘도 회색으로 잦아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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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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