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없다고 인권마저 없을까

“노숙인은 가축이 아니다”

등록 2002.11.20 16:21수정 2002.11.20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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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도시 빈민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의 눈길. 그러나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도시빈민’의 범주에조차 속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

a 서울역 오전 열시. 차마 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노숙인이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다

서울역 오전 열시. 차마 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노숙인이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있다 ⓒ 임김오주

인권의 사각지대

노숙인들에게 겨울은 ‘인권 탄압’의 계절이다. 지난 10월 21일(월) 노숙인들이 역내 치안을 담당하는 철도청 공안원들로부터 뜨거운 물세례를 받고 질질 끌려 다니는 등 가혹한 폭행을 당한 일이 밝혀졌다.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는 서울역 공안원들에 대해 노숙인 김현용씨는 “겨울엔 추위 때문에 역 안에서 잠을 자는데 누워 있으면 공안들이 와서 나가라고 한다. 갈 데가 없어 다시 들어오면 공안실로 데려가 폭행을 가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노숙인복지와 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노실사)’ 대표 문헌준씨는 “공안원들의 노숙인에 대한 폭행은 비일비재 해왔다. 노숙인들은 맞아도 술 마시다 넘어졌다는 등의 말로 얼버무렸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봇물 터지듯 폭행 사례가 드러나고 있다”면서 공안원들의 노숙인에 대한 미비한 인권의식을 지적했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폭행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어 ‘노실사’ 문헌준 대표는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행위가 점조직 형태로 드러나 있다. 쪽방 값을 내준다며 노숙인에게 접근해 인감·주민등록증을 가져가서 카드를 만들어 대출하고 빚을 떠넘기거나, 한 사람 당 30만원 여 씩 멍텅구리배나 새우잡이배에 떠넘기는 등 사기·인신매매 문제가 심각하다”며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여성 노숙인의 경우 전체 노숙인의 10% 미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더하다. 여성 노숙인은 항시적으로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역으로 성매매를 삶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의 무료진료소 간호사 류정미씨는 “여성 노숙인 중에는 미혼모가 상당수 있다. 10-20대의 경우 가족 해체로 인해 거리 노숙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 성매매는 손쉬운 돈벌이의 수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정신 지체로 가족에게 버림받은 경우도 있는데 임신 사실을 자가진단하지 못하여 임신 중에도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는 등 기형아 출산의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다. 아이를 낳아도 가족들이 외면하므로 자선 단체에 떠넘겨지게 된다”며 여성 노숙자에 대한 특수한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집계된 서울 거리 노숙인 수만 해도 지난 99년에 비해 15%나 증가했다. 또한 노숙인들의 평균 교육 년수는 채 10년에 못 미치며 13세 때부터 노동 경험이 있는 등 결과적으로 절대적인 빈곤을 경험하고 있다.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가정불화로 인한 가족 해체를 경험한 노숙인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노숙인 문제는 남녀노소, 신체·정신적 장애, 마약, 실직, 가정폭력, 폭행 등의 복합적인 성격을 띠며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a 아들 사업이 망해 아는 사람 집에 얹혀살고 있다는 할머니. 눈치가보여 조금이라도 방값을 내려 모 역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언제 거리로 나오게 될지 모르는 잠정적 노숙인이다

아들 사업이 망해 아는 사람 집에 얹혀살고 있다는 할머니. 눈치가보여 조금이라도 방값을 내려 모 역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언제 거리로 나오게 될지 모르는 잠정적 노숙인이다 ⓒ 임김오주

힘겨운 외줄타기

이렇게 노숙인 문제의 양상은 더욱 복합적으로 심화된 데 반해 노숙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외환위기가 4년여 지난 현재, 노숙인을 ‘사회 현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길거리로 내몰린 ’게 아닌 ‘자신의 무능 탓에 나앉게 된’ 사람이나 ‘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부랑자’ 정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후 160여개에 달했던 노숙인들의 쉼터가 반으로 줄어든 데에는 이러한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7백여 명을 수용하고 있는 쉼터 ‘자유의 집’도 곤란에 처해 있다. 99년 초 서울시가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던 이 부지의 계약기간이 지났지만 노숙인의 수는 오히려 늘어나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노숙인들을 혐오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주민들의 인식도 문제이다.

이에 ‘자유의 집’ 기획관리실의 서계식씨는 “노숙인들은 가축이 아니다. 최소한의 존엄성만을 유지할 정도로 음식을 나누어주고 진료를 해 준다고 해서 노숙인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할 때에 근본적인 해결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집’ 있는 사람만 인권을 누리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노숙의 가능성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덧붙여 강조했다.

[취재수첩] 물을 수 없게 된 질문

노숙인 문제에 대한 기사를 맡은 후 노숙인이 노숙인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노숙인들이 주로 모여 있다는 서울역, 영등포역과 을지로, 회현 등지를 돌아다니며 내가 보고 느낀 것은 노숙인의 현실이 아닌 ‘피사체’로서의 노숙인일 따름 아니었던가. 자괴감을 심하게 느끼면서도, 보도가 곧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자위하며 조심스레 셔터를 눌렀다. 혹여나 눈치 챌 새라 짐짓 딴청도 피워 가면서.

지난 12일(화)에는 영등포역에서 몰래 카메라를 품고 돌아다녔다. 한참을 후비고 돌아다니면서 몰래몰래 사진 몇 장을 찍었으나, 혼자서 노숙인에게 말을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아니, 도움을 주고 싶다는 가장된 표정으로 다가가 기사 거리를 따 내기에는 그들의 모습이 생각보다 더 힘겨워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착잡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실직 노숙인 무료 상담소’라고 적혀 있는 컨테이너박스가 눈에 들어 왔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인터뷰나 따 볼 요량으로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의 이범승 씨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범승씨는 내가 던지는 시시콜콜한 질문들에 내내 집중하지 못했는데, 다른 봉사자들이나 상담 받으러 온 노숙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나와의 인터뷰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알맹이’가 나오지 않자, 인터뷰에 집중해달라고 부탁하려는 찰나 이범승 씨는 오히려 선수를 쳤다. “내일 다시 오세요”라고.

다음 날, 오후 8시 즈음 다시 한번 찾아간 나는 일단, 콘테이너 안이 인터뷰를 할 수 있을 만큼 한적한지부터 살폈다. 컨테이너 안은 한산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본격적인 인터뷰 준비를 하려는데 이범승씨는 이번에도 ‘아직’이란다.

대신 나에게 봉사자들이 입는 옷을 입힌 채 영등포역 순회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순회라는 건 별 것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매우 중요한 활동이라면서 역 안에서 TV를 보고 있는 노숙인, 이미 자리를 펴고 누워있는 노숙인, 바람막이로 세워 놓은 박스 안에 들어가 계신 할머니 등 노숙인 모두에게 일일이 건강과 안부를 물으며 건강이나 안전 상태를 체크했다.

영등포역 옆 공원으로 향하는 길,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숙인 한 분이 쓰러져 있었다. 옆에서 크게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지, 눈을 크게 뜨고 신음만 토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지만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이와 같은 상황을 몇몇의 인원이 감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다른 구역을 돌아보고 오기로 했다.

20여분 후, 다시 돌아왔을 때, 웬일인지 쓰러져 있던 그 노숙인은 보이질 않았다. 좋지 않은 느낌이 스칠 무렵 다른 노숙인으로부터 “어떤 이가 죽어 실려 갔다”는 이야기만을 전해 듣게 되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목소리가 들리세요?’라고 물었던 것이 그 분이 세상과 가졌던 마지막 대화였던 것 같다. 차갑고 더러운 역전에서,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상황에서 도시가, 사회가 버린 한 ‘인간’은 그렇게 죽어갔다.

“그 때 119에 신고했더라면…”이라고 되뇌이는 이범승씨에게 던질 질문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 임김오주 기자

덧붙이는 글 | 대학생신문 17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대학생신문 17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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