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뒷모습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등록 2002.11.21 11:07수정 2002.11.2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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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 편이었던 아버지


"아비만 한 자식 없다"는 속담이 있다.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효성이 아무리 지극하다 해도 아버지의 자식 사랑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릴 때는 대체로 아버지의 사랑을 잘 모른다. 때로는 남의 아버지보다 못한 자신의 아버지가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어른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길러 본 후에야 어렴풋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가 끝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참 사랑을 속속들이 느끼는 게 우리네 어리석은 인생사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청개구리의 우화'가 두고두고 전해져오는가 보다. 아버지를 여의면 그 자식을 일러 고자(孤子)라 한다. 곧 '외로운 자식'이란 뜻이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자기 편에 서서 자기를 위해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버지 이상 없기 때문이다.

5·16 쿠데타 이후 아버지는 서울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당신의 본거지였던 부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부산 아미동 산동네에다 거처를 마련한 후 나만 홀로 서울에 남겨두고 어머니와 동생도 불러들였다.

아버지가 다시 시작한 사업은 화물꼬리표와 과수용 배 봉지를 만들어 대한통운과 배 조합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부산 시내 재단소를 두루 다니면서 자투리 크라프트 지(紙)를 모았다.


그 자투리 종이에다 인쇄를 하고 물감을 들인 뒤 구멍을 뚫어 철사를 꿰면 꼬리표가 되었다. 배 봉지는 고물상들이 수집해오거나 외국에서 수입해온 신문지를 사다가 재단을 해서 풀칠을 하여 만들었다. 일감이 없을 때는 다른 봉투도 만들어 국제시장 봉투가게에 납품하기도 했다.

일감이 적을 때는 우리 가족들로 충분했지만 점차 일감이 많아지자 아미동 산동네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나누어주었다. 산동네 사람들은 반찬값이나 연탄값을 벌기 위해, 우리 집에서 일감을 가져다가 꼬리표나 봉지를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매우 후했다. 당신은 업자들로부터 제때에 돈을 받지 못해도 그들의 품삯만은 급전을 내서라도 제 날짜에 어김없이 지불했다. 당신 주머니에 돈을 두고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집에 가자마자 내 지갑 돈마저 털어 주기에 불평했다.

"양식이 떨어져서 그런 모양이다. 몇 푼 벌려고 온 식구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다."

풀이 죽은 아버지의 뒷모습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학군단 병영생활을 마치고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마침 국제시장 봉투도매상에 수금하러 가는데 굳이 동행하자고 했다. 아마 아버지는 돈 거래가 질긴 곳이라 아들 등록금 때문이라고 하면 수금이 쉽지 않을까 하는 헤아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더러 도매상 주인에게 인사를 하라고 일렀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분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는데 어쩐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곧 그분은 선반에서 봉투뭉치를 꺼내더니 풀칠이 제대로 안된 물건을 납품하고서 돈 받으러 왔다고 아버지를 몹시 나무랐다. 그리고는 당장 가지고 가서 풀칠을 다시 해 오라고 봉투뭉치를 내던지면서 대단히 모욕적인 말을 했다.

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자 그 낌새를 눈치 챈 아버지가 얼른 봉투뭉치를 들고 내 앞을 막으며 빨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아버지와 나는 봉투뭉치를 나누어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울화가 치밀어 아버지에게 항변했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서도 왜 아무 대꾸도 못하시고 그냥 돌아오십니까?"
"그 가게가 내 오랜 단골 거래처이고, 어쨌든 제품에 흠이 있는 것은 내 잘못 아니니? 너도 살아 보아라. 이보다 더 험한 일도 많다."

나는 풀이 죽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자 눈시울이 얼얼해졌다. 어린 시절 그렇게 커 보였고 당당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해직 교사였던 아버지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란 나는 이따금 뵙는 아버지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일제시대 아버지는 구미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배달과 낫도 장수를 하며 중학교를 다녔다는데 일본학생을 물리치고 반장을 줄곧 했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아버지가 중학교 졸업 무렵 여름방학 때 귀국하자 그때는 태평양전쟁 막바지로 학병에 끌려갈까봐서 할아버지는 집안의 대부터 잇는다고 서둘러 결혼시켰고, 다음 학기 귀국 때는 할아버지가 도개 누님 댁으로 아예 피신시켰다.

하지만 거기서 주재소 주임에게 발각되어 전시에 젊은이가 빈둥빈둥 놀고 지낸다면서 도개보통학교에 임시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곧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사나 친일 교사는 도망을 갔는데, 아버지는 해방경축대회에서 제자들이 무동을 태워 운동장을 돌았는데 그때 면민들이 열화와 같이 환호했다고 한다.

"그때 내가 학생들에게 대단한 민족의식을 교육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아이들이 일본말 대신 우리말을 했다고 뺨을 때리지 않았고, 여름날에는 낙동강 모래밭으로 데리고 가서 머리때를 벗겨주고 씨름판을 벌이곤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 무동을 탄 그 순간이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단다."

그 후 모교인 구미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1946년 10·1항쟁 때 해직 당한 뒤 부산으로 가서 사업의 길로 나서 크게 돈을 벌었다. 아버지는 집안뿐 아니라 고향마을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년에 모든 재산을 다 날렸다. 어머니마저 비명에 가시자 나는 아버지에게 제가(齊家)를 못했다고 무척 섭섭하게 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일방으로 사랑했다. 내가 대학 졸업과 동시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광주 보병학교를 수료 후 전방 소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를 올리자, 아버지는 몇 가지를 신신 당부했다. "너와 맞서고 있을 북녘 병사도 한 민족이라는데 가슴이 아프다." "헛된 공명심이나 돈 몇 푼에 눈이 어두워 월남전에 지원하지 말라. 지금 월남전은 남의 통일을 방해하는 전쟁이다. 내 말은 후세 역사가 판가름할 것이다." "사병들 두들겨 패지 말고, 부대 쌀 도둑질해서 사병들 배 곯리지 말라"고 했다.

군 복무 내내 이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버지는 내가 교사가 된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교사 초임시절, 오산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서울로 오셔서 하루는 출근길에 따라 나섰다.
"네가 근무하는 학교도 보고 싶고, 교장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아비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한번은 학교 안팎이 어수선해서 교사생활을 그만두고자 아버지에게 상의를 드렸다.
"그래도 학교 사회가 덜 썩었다. 교사는 모름지기 학생을 보고 사는 거다."

아버지는 당신이 못 편 교육자의 뜻을 아들이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 겉봉에 꼭 "박도 선생님 귀하"라고 썼다. 내가 민망스러워 그렇게 쓰지 마시라고 하면 "너는 네 아들이지만 이 나라 2세들의 선생님이다"고 하면서 교사는 모름지기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끝까지 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의 가장 열렬한 애독자

내가 <비어 있는 자리>라는 첫 작품집을 펴내자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머리맡에 아들이 쓴 책을 두고 돋보기를 쓰고는 날마다 읽으신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충대충 보지 않고 꼼꼼히 읽으시고는 잘못된 점이나 오자를 찾아서 그때마다 전화나 편지로 일러주셨다.

"얘, 네가 이런 걸 어떻게 다 알았니?"
아버지는 아들이 쓴 글에 나온 사실과 표현에 대해 조목조목 신기해하면서 자식의 성장을 기특히 여기셨다. 어느 날 출판사에 갔더니 이상하게 부산 시내 서점에서 주문이 가장 많이 온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가 서점에서 수백 권을 사서 친지들에게 돌렸기 때문이었다.

1980년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을 때 아버지는 시국을 비판하다가 보안법 위반으로 2년 4개월 복역하셨다. 출소 후, 당신의 생업을 팽개치신 채 그림에만 몰두하셨다. 돈도 한 푼 되지 않을 그림을 그린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무수히 핀잔을 받았다. 그때마다 당신은 그림을 그려야만 입을 닫을 수 있고 치솟는 울분을 삭일 수 있다고, 침묵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그리는 화제는 달마상이나 '대춘록보(待春鹿譜)'라 하여 눈보라가 치는 들판의 사슴이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 사슴의 눈길이 닿는 곳은 통일의 그날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다시 교도소로 가실 것 같아서 불효막심하게도 아버지의 그림에 한 번도 찬사를 보내거나 격려의 말씀을 드린 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그림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돌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느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했고, 아들이 쓴 글이라면 다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나의 가장 열렬한 애독자였다. 서울 내 집에 오시면 네 글감이 될 거라고 졸음에 겨운 아들을 붙잡고 그 동안 살아오신 얘기를 들려주셨다.

하지만 그때 나는 별반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메모해 두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나는 가장 귀한 독자를 잃었고, 가장 생생한 글감을 놓친 셈이다.

아버지가 이따금 오실 때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 드려야 할 옷이나 치아를 해 드리면 "부모가 효자를 만든다"고 하시면서 아들에 대한 섭섭한 말은 다 빼고 친지들에게 '내 자식은 모두 효자 효녀'라고 자랑했다. 그래서 아버지 친구 분으로부터 "자네는 참 효자일세"라는 전화를 받을 때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

나라님도 수신제가가 힘들고, 나 자신도 호주가 된 지 여러 해 지냈건만 수신제가를 제대로 못하면서도 지난 날 철모르고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 이제 와서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뉘우친들 사후 약방문일 뿐이다.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 어른 말씀이 하나도 안 틀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삶과 꿈' 2002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 '삶과 꿈' 2002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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