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의 루쉰. 그가 창작활동을 하던 시기는 신해혁명, 5-4운동 등 격변의 시기였다루쉰박물관
그럼 현대 중국에서 루쉰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현대 중국에서 루쉰의 위상은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론’에서 “노신은 중국 문화 혁명의 주장(主將)이다. 그는 위대한 문학가일 뿐 아니라 또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위대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문화전선에 있어서 노신은 전민족의 대다수를 대표하여 적을 향해 맹렬히 진격해간 정확하며 가장 용감하고 가장 굳세고 가장 충실하고 가장 열렬한 공전의 민족영웅이었다. 노신의 방향은 곧 중국 민족 신문화의 방향이다”(전형준 ‘현대 중국문학의 이해’에서 재인용) 라고 말한데서 거의 결정이 됐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옌안(延安)시절에 루쉰의 책을 밤새도록 읽어서 ‘마오쩌둥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다.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찬사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그의 텍스트가 가장 숭앙받는 존재가 됐다. 때문에 그는 문화대혁명에도 크게 손길이 뻗히지 않았던 드문 사상가로 대우받았다. 실제로 그는 “소설가요, <문화편지론 文化偏至論>이나 <악마시역설 摩羅詩力說> 등을 발표한 문화 문학이론가요, 고전시 현대시 산문시 등을 쓴 시인이요, 어사사(語絲社)나 미명사(未明社) 망원사(莽原社) 등의 문학동인을 조직했던 문학운동가요, <미명총간> <오합총서> 등을 편찬 출간한 출판가요, 하문대학과 중산대학 등에서 강의한 교수요,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을 비롯 중국자유운동대동맹 중국민권보장동맹 등을 조직했던 민족운동 정치 운동가”(허세욱, ‘중국현대문학사’에서) 였다.
그는 때로 좌절했지만 중국인의 마음을 고치는 ‘정신의 의사’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타고 났었다. 그는 산웨이슈위앤 등 전통적인 교육방식에서부터 막 눈이 뜨기 시작한 서구문화를 어려서부터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열세살인 1893년 관직에 있던 조부가 과거시험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1894년 겨울에는 부친이 중병에 걸려 2년 가량 투병하다가 사망함으로써 샤오싱에서 내노라했던 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해 그는 외가를 다니면서 가난한 농민들과 가난한 도시 지식인들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의 과학은 물론이고 철학 등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시점도 중요했지만 영웅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난세라는 요인도 그에게는 적절했다. 그가 성장한 시점은 청조가 서구 열강에 무너지고, 서구민주주의, 공산주의 등 수많은 사상이 앞 다투어 동양에 들어오는 한편 일본도 서서히 제국주의로서의 마각을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표출해야한 문학적 사상적 자산은 너무나 풍부했다.
때문에 루쉰은 “스스로를 중국 사회 변혁기의 ‘중간물’이라 여기고는 깜깜한 갑문을 어깨로 떠받치듯 인습의 무게를 감내하면서, 스스로 ‘중국의 마지막 지식인’이 되길 희망했다.”(빙신(冰心) ‘중국문학사’ 중에서)
하지만 사상가임을 중심으로 부각된 자신 때문에 문인으로서 그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때문에 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에서 문인으로 루쉰을 더 자세히 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기도 하다. “먼저 루쉰이 있는 그 자리로 돌아가자”라는 기치 아래 소설의 창작에 큰 영향을 주는 그의 내적 모순과 다양한 갈등을 분석하기 위한 작업도 중시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전근대성 타파 희망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