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30>성주사 곰절

등록 2002.12.02 16:18수정 2002.12.0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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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산 성주사 곰절
불모산 성주사 곰절창원시
"아나?"
"그기 뭐꼬?"
"머루다"
"머루가 와 이리 알이 크노?"
"고마 퍼뜩 무라카이. 누가 볼라"
"우와~ 사카리보다 더 달다"


그날, 가재가 놀고 있는 그 시린 물이 흐르는 계곡에 앉은 그 가시나가 내게 준 것은 머루가 아니라 산포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 가시나의 꾹 다문 입술처럼 작고, 쌍꺼풀 예쁘게 진 그 가시나 눈빛처럼 까만 그 산포도를 머루라고 생각하며 씨도 뱉지 않고 그냥 삼켰다. 그리고 그 가시나도 내가 떼주는 그 까아만 산포도를, 아니 머루 몇 알을 그 예쁜 입술로 받아먹었다.

"니, 내가 좋제?"
"......"
"말 안하모 맞다카는 기다. 그쟈?"
"가시나 그거요, 꼭 그걸 내가 말로 해야 알것나?"
"나는... 니가...
"???"
"아, 아이다"

산 정상에 미사일기지가 우뚝 솟아 있는 불모산(801) 가슴팍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성주사 곰절. 성주사 곰절은 그 당시 사춘기에 마악 접어든 우리들에게 첫사랑의 여러 가지 추억을 남겨준 곳이었다. 또한 성주사 곰절은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 때, 봄소풍과 가을소풍을 가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러니까, 중학교에 다닐 적에 우리는 무려 6번의 소풍을 모두 성주사 곰절로 갔던 것이었다.

성주사는 행정상으로는 경상남도 창원시 천선동102번지, 불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다. 성주사 곰절은 가야시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妃)인 허왕후가 일곱 아들을 입산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는 그런 전설이 담겨있는 고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확실치는 않다.

성주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기록으로는 신라 흥덕왕 때, 무염국사가 남해안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를 도력으로 물리치자, 왕이 무염국사를 국사로 삼고 논과 노비를 하사하여 흥덕왕 10년 835년에 절을 세우고, 성인이 상주하는 곳이라 하여 "성주사"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런 성주사가 곰절이라고 불리워지게 된 까닭은 대략 이러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주사는 왜구들에 의해 불타 없어진다. 이후, 조선 숙종과 순조를 거치면서 불타버린 성주사를 재건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사찰을 짓기 위해 쌓아둔 목재를 곰이 나타나 하룻밤새 절을 모두 지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성주사를 "웅신사" 또는 "곰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주사 곰절 입구에는 돼지 형상을 한 곰 두마리가 늘 절 입구를 지키고 있다. 우리는 소풍만 가면 늘 그 곰 두마리를 타고 사진을 찍었다. 그 곰을 타고 사진을 찍으면 자신이 원하는 그 어떤 소원 한가지가 이루어진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그 형상은 곰이 아닌 돼지였다.


"이크!"
"자슥~ 니 누구한테 죄 지었나? 그림 보고 와 그리 놀래노?"
"시퍼런 칼 빼 든 모습이 니는 안 무섭나?"
"나는 죄 지은 기 없다. 그래서 한 개도 안 무섭다"

그렇게 일주문을 지나 성주사 곰절을 한바퀴 휘이 둘러보고 나면 우리들의 소풍은 이미 절반이 훌쩍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성주사 계곡으로 내려가 편편한 바위를 깔고 앉아 그 맛있는 김밥을 까먹었다. 그리고 목이 메이면 그 노오란 도시락 두껑으로 바위틈을 미끄러지는 그 맑은 물을 떠다가 꿀꺽꿀꺽 마셨다. 달착지근한 사이다나 콜라로 생각하면서.

"니 오늘도 도시락으로 고매(고구마) 싸왔나?"
"우짤끼고. 배 고픈데 고매라도 묵어야지. 그라고 우리 할매는 다음에 할매 아이가. 내가 소풍 갈 때만큼은 김밥 좀 싸달라카모 맨날 다음에 다음에 이란다 아이가"
"아나?"
"아이다, 나는 고마 고매 묵을란다"
"얄마~ 내가 그 고매가 묵고 싶어서 그란다 아이가. 아나? 이 김밥하고 그 고매하고 바꿔묵자"

그렇게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성주사 곰절 주변의 널찍한 공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조별로 편을 가뤄 손수건 돌리기와 보물찾기, 장기자랑, 노래자랑대회 등을 연이어 계속했다.

그리고 마산쪽 하늘로 해가 서서히 떨어질 때면 젓가락이 든 그 빈 도시락을 딸그락 딸그락거리며 하산준비를 했다. 이윽고 저녁햇살에 은빛으로 빛나는 그 미사일기지, 그 미사일기지에 바알간 노을이 걸리면 우리는 그 바알간 노을을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그렇게 불모산을 내려왔다.

그래. 그렇게 산을 내려오면서 바라보는 창원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반쯤 잘려나간 야트막한 산들, 마악 부숴지고 있는 초라한 마을들, 붉은 흙더미 속에서도 용케 조금 남아 파아란 보리싹을 내밀고 있는 논들, 이리저리 길이 닦인 텅 빈 벌판에 우뚝 선 오래된 정자나무 한 그루, 곳곳을 누비고 있는 불도저와 포크레인, 또다시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다이너마이트 소리...

하지만 당시 창원에 불고 있는 개발바람이 아무리 거세어도 성주사 곰절만은 안전할 것이리라 생각했다. 또한 성주사 곰절에까지 개발바람이 불어닥친다는 것은 우리들의 은밀하고도 아름다운 추억들을 깡그리 부숴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그 늦은 가을소풍을 갔던 그날, 우리는 하산하면서 성주사 곰절 입구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라고 붉게 씌여진 그 글씨 앞에서 두손을 모았다. 부처님, 제발 성주사 곰절만은 지금 그대로 지켜주십사고.

하지만 얼마전 가 본 성주사 곰절은 예전의 성주사 곰절이 아니었다. 미사일기지는 예전 그대로 햇살에 그 눈부신 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대웅전보다 더 큰 요사채가 대웅전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성주사 곰절에는 이제 예전의 그 성주사 곰절은 사라지고 없었다. "성주사"라고 쓰여진 그 큰 간판만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을 뿐.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들은 불모산 계곡을 철저하게 가로막은 철조망 사이에서 벌겋게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성주사 곰절로 가는 길목에 푸르게푸르게 찰랑거리던 그 산장호수는 철조망 속에 갇혀 파아란 눈물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문득, 불모산 계곡을 휘이이~ 휘어감는 겨울바람 한자락이 다가왔다.

"아나?"
"그기 뭔데?"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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