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심미선, 신효순' 두 학생의 처참한 죽음과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두 미군 병사의 무죄평결 때문에 한국에 반미(反美) 분위기가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당국자들이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허버드 대사가 부시 대통령의 '너무도 약소한 사과를 뒤늦게나마' 전하는가 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소파(SOFA) 개선을 지시했답니다. 대선을 불과 3주일 앞둔 후보자들까지도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부랴부랴 대미 정책을 뒤집는 시늉까지 하는 후보도 나오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가 주체성과 자주(自主) 의식을 높이고, 큰 나라에 대해서도 할말은 하는 국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두 학생의 죽음도 결코 헛되지 만은 않겠지요.
그런데 한국인의 자존심과 자주의식의 발로인 '반미(反美)'주의가 그 '이름' 때문에 거꾸로 자존심과 자주의식에 먹칠을 할 수도 있기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미국(美國)'이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미국(美國)'이라는 이름은 한국말로는 터무니없는 이름입니다. 지금은 아무 스스럼없이 쓰이고 있지만 주체성도 국적도 없는 이상한 이름이란 말입니다. 지난 4월쯤에 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제가 <오마이뉴스>에 낸 첫 기사와 그 후속 기사들이었지요.
거기서 저는 '미국(美國)'이라는 이름을 그냥 쓰는 것은 그 나라(USA)에 걸맞지도 않을 뿐 아니라 중화 사대주의까지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美國)'이라는 이름은 생각 없이 중국 관행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때마침 '해태제과 소액주주 운동본부'라는 단체가 '미국(美國)' 이름의 한자어를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美國을 米國으로 쓰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거기에 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중화 사대주의를 피하려다가 일본 사대주의로 빠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미군의 두 여중생 압살 사건을 계기로 어떤 연예인이 앞으로 '미국(美國)을 미국(尾國)으로 부르자'고 했더군요. 아름다울 미(美)자 대신 꼬리 미(尾)자를 쓰자는 것이지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한국을 꼬붕 취급하는 나라에다가 '아름답다(美)'는 이름을 붙여주기 싫은 거지요.
그러나 거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정착되기 힘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양 '국민' 사이에 감정만 상하고 불신만 쌓는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 나라 이름을 꼭 한자로 지어주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중국사람들이 유에스에이(USA)를 '美國' 이라고 쓰고 '메이꿔'라고 읽는 이유, 그리고 일본사람들이 '美國'이라고 쓰고 '베이고꾸'라고 읽는 까닭을 알면 제가 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지 분명해 질 것입니다.
중국말 '메이꿔(美國)'는 '메이리지안 헤쫑꿔(美利堅合衆國)'의 약자입니다. '메이리지안 헤쫑꿔'는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이름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고요. 너무 길고 번거로우니까 맨 앞자와 끝자를 따서 '메이꿔(美國)'로 줄인 것입니다.
일본말 '베이고꾸(米國)'도 비슷한 과정을 따라 정착됐습니다. 'United States of America'의 일본말 번역은 카다카나를 섞어 'アメリカ合衆國'이라고도 하고 한자로만 써서 '亞米利加合衆國'라고도 합니다. 발음은 모두 '아메리카 가슈우고꾸'로 같습니다.
약자 이름 '베이고꾸(米國)'는 한자이름의 둘째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것입니다. 첫째가 아니라 둘째 글자를 딴 것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보입니다. 첫 글자 아(亞)를 고집해서 '아국(亞國)'이라고 하면 '아시아의 나라'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중국 이름과 일본 이름에서 주목할 점은 '메이(美)'와 '메(米)'가 모두 America의 소리를 빌린 말이라는 점입니다. '메이리지안(美利堅)'과 '아메리카(亞米利加)'를 줄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중국과 일본이 USA를 '메이꿔(美國)'라거나 '베이고꾸(米國)'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나라 말의 음운론을 따랐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USA를 '미국(美國)'이라고 부릅니까? 슬프게도 그 이름은 한국말 음운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중국 음운론에 따라 만들어진 한자어 '美國'를 들여다가 한국식 발음으로 읽을 뿐입니다. 까놓고 말해서 중국 것을 그대로 베낀 것이지요. 한국말 음운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럼 한국 사람이 한국 음운론에 맞게 만들었던 이름은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America를 '며리계(며里界)'라고 음차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며 며'자가 인식되지 않는 점을 양해 바랍니다.)
1853년(철종3년) 1월30일(음력 12월21일) 경상도 동래부 용당포(현재 부산)에 미국 포경선 '싸우스 어메리카(The South America)'호가 표류해 들어왔었습니다. 조선 관리들이 문정(問情: 심문)을 위해 이양선(異樣船)에 올라타기는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필담(筆談)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선원들은 한문을 모르고 조선 관리들은 영어를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이때 중요한 '받아쓰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배의 선원들이 '며리계'라는 말을 자꾸 반복하더라는 기록을 조선 관리들이 남긴 것입니다. 선원들이 America라고 한 것을 조선 관리들이 소리나는 대로 받아쓴 것이지요. 뜻도 모른 채 말입니다.
'하며 며'자가 그다지 정확한 음차어가 아닌 게 사실입니다. 한국 한자음으로 '메'로 읽히는 한자가 없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며'자를 썼던 것이겠지요. 아무튼 이런 사연으로 '며리계'는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America 음차어가 됐습니다.
그 이름을 따랐다면 United States of America는 '며리계합중국', USA는 '며국'이 됐겠지요. 그러나 그 이름들은 실용화되지 못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말에게 밀렸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미리견'과 '메이꿔'에 밀려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지금 와서 '며리계'와 '며국'을 살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하며 며'자는 통용한자 2000자에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며리계'를 쓰기 위해 그걸 다시 살려내는 것도 좀 그렇잖습니까?
게다가 America를 음차 하는 데에 꼭 한자를 써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글로 하면 훨씬 더 쉽고 정확하게 음차할 수 있습니다. '어메리카' 혹은 '아메리카'가 바로 그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미 '어메리카 합중국'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약자이름으로는 '어국'이나 '엄국' 혹은 '메국' 같은 것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어국'은 첫 음절을 딴 것이고, '엄국'은 첫 음절에다 둘째 음절의 첫 자음을 받침으로 쓴 것입니다. '메국'은 둘째 음절을 딴 것이지요.
저는 그런 대안들 중에서 '메국'이 가장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미국' 발음과 연관성도 유지되고 America 음차어 특성도 살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메국'은 한국 음운론에 바탕을 둔 흠잡을 데 없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미국(美國)'을 '메국'으로 바꾸자는 주장은 좀 우스꽝스럽거나 무모해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미국'을 '메국'으로 바꿔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중요한 선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체성과 자주 의식을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시기가 아주 좋습니다. '미국(美國)'이 한국을 얕잡아 보는 게 말썽이 된 지금, 그들의 이름을 바꿔 버리는 것입니다.
'아름다울 미(美)'자를 빼 버림으로써 우리의 감정과 의사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비하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주체성과 자주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그 상징적 효과는 굉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미국(美國)'을 '메국'으로 바꾸어 쓰면 용례가 어떻게 되느냐고요? 무궁무진합니다.
종메... 친메... 용메... 반메... 극메...
메제국주의... 메패권주의... 메지상주의... 메중심주의...
한메교역... 북메대화...
주한 메군... 메국 대통령... 주한 메대사 등등...
아주 쉽습니다. 그냥 '미'를 '메'로 바꾸기만 하면 되니까요. 자꾸 쓰다보면 익숙해 질 겁니다. 저는 하도 '메국' 생각을 해서 그런지 거꾸로 '미국'이라는 말이 어색합니다. 사실 '미국(美國)'이 처음부터 익숙한 이름이었겠습니까? 쓰다보니까 입에 익은 것뿐이지요.
'미국(美國)'이름 '메국'으로 바꾸기....
한번... 안 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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