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까놓고 사회민주주의로 가자”

월간 <말> 김성환 편집국장 인터뷰

등록 2002.12.05 14:28수정 2002.12.0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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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지 하면 어렸을 적 친구 때문에 토라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참 말하는데 재미가 붙어가던 나이, ‘설전’은 일종의 자존심과도 같은 문제였다. 그 날도 친구와 어떤 사소한 문제로 티격태격 싸움 아닌 싸움을 했던 것 같다. 설왕설래하던 중 그 친구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야! 무슨 말 좀 해봐”라고 하자 또 한참을 궁리만 하는 그를 보며 ‘이겼다’는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설전에서의 승리의 쐐기를 박으려 “말 좀 해보라니까?”라고 재촉했을 때 친구가 던진 말은 겨우 “말”이었으니, 이제 이긴 거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웬걸. 곧이어 숨을 한번 들이키더니 줄줄 꼿꼿한 말들을 쏟아낸다. 나야말로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게진 채 서 있다 애써 삐진 척, 위기를 모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진보언론의 산 역사, ‘말’지의 느낌도 비슷하다. 한번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할 말이 많다. 그냥 끝나지는 않는 ‘말’이다. 방심하고 있다보면 어느새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말’이다. 김성환 편집국장도 ‘말’ 같은 사람일까. 그 때의 그 친구 같은 사람일까.

a 편안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 김성환 씨. 어쩐지 사진기 앞에서도 그저 편안할 뿐

편안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 김성환 씨. 어쩐지 사진기 앞에서도 그저 편안할 뿐 ⓒ 임김오주

개량은 이미 시대정신

“그 때 말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했지요.”

그가 ‘말’지 편집국장을 맡기 직전인 99년 말의 상황은 ‘민혁당’ 박종석 사건의 여파로 말지 경영진이 바뀌고 기자 한 명이 구속되는 등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기류가 흐르고 있던 때였다. 편집국장으로의 ‘벼락 출세(?)’라는 명분 하나로 선뜻 ‘말’지의 요청에 응했던 것은 80년대 교내시위로 수감생활을 하고, 민주화청년연합의 의장을 맡기도 했던 ‘운동권’인 그에게 ‘말’지는 남의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그런 말지가 자신을 필요로 했고, 거기엔 그저 조그만 의지를 필요로 했을 뿐이라고.

‘말’지에서의 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그가 느꼈던 기분은 한마디로 ‘정자에 앉아있다 저자거리로 나온 기분’. “민청련 의장을 지낸 이후 대중적인 국사이야기를 풀어내 보고 싶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이후 역사신문 집필진을 지냈었지요. 단행본이었고, 이 시대에 내가 살았더라면이라는 자유로운 가상의 취재를 하는 것이었기에 편집실의 분위기는 말지의 그것과 비교하자면 무척 평온했던 것 같아요.” 그랬던 만큼, 말지가 주는 현장의 생생함은 더욱 큰 강도로 다가왔다.

3년이 다 되어가는 2003년으로 가는 길목, 올 한해 그가 느낀 가장 ‘생생’한 기억은 무엇일까. 김성환 씨는 알면서 묻냐는 듯이, ‘전철연 사건’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최근 발행된 말지 12월 호 그가 쓴 데스크칼럼에서 이미, 9월호 말지의 전철연 비판 기사에 말지 판매처 사무실 기물 파손으로 대응한 전철연에 대하여 ‘처음부터 법적인 대응을 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강한 유감을 표한 바 있다.


알면서도 물어본 태가 팍 느껴지는 질문에는 의례적인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는
“넓은 의미에서 같은 운동권인데…”라며 “말”이란 대답을 하는가 싶더니 역시나 조곤조곤 ‘법’적 대응을 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말’을 꺼낸다. 그것은 곧 그가 바라보는 ‘좌파’가 처한 문제점과도 같다.

“2000년대 한국에서도 자본주의를 청산해야 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목표는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80년대에도 존재하던 큰 틀로서의 목표일뿐이죠. 지금은 법 테두리를 무시하는 파쇼 정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도의 틀 안에서 개혁을 추구해야 하는, 절차를 존중하지 않고서는 대중들을 이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개량’을 두려워해 시대를 읽는 눈마저 가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시대정신이 개량아니냐, 개량하지 않고 어떻게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나, 혁명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냐는 걸 이제 좀 눈치 보지 말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2004년, 의회 내 좌파블럭

개량은 곧 시대적 ‘전술’인 그에게 당연히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의 행보가 마음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권영길 후보가 TV토론 나와서 말하는 것 다 개량하자는 거지, 혁명하자는 것 아니드만. 그러면 적어도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를 극복대상으로 봐서는 안되지 않나?”

아예 탁 깨놓고 나는 개량주의자다, 사민주의자다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냐는 것. 이어 대뜸 “왜 민주노동당하고 사회당하고 합치지 않는 건가?”라고 반문한다. 반문의 핵심은 진보·보수 개념의 ‘상대성’에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당도 우파일 수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김성환 씨 자신의 표현대로 민주노동당 내 정치지형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하다는 문제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회주의자의 순결성을 대중들이 표로서 인정해 주긴 힘들죠. 이번 대선 이후를 보자는 것입니다. 주체사상 추종자는 우파도 아닌 한국적 상황에서 생겨난 변종일 뿐인데, 극복해야 할 대상을 지레 피하지는 말자는 거죠.”

그가 바라보는 대선 이후의 상황이란 2004년, 의회 내에 형성될 좌파 블록이다. 유럽에서 처음에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을 때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너덜해진 청바지 입고, 운동화 꺾어 신고, 자전거 타고 들어갔던 ‘충격’적인 모습과 같은 퍼포먼스라도 준비하자고. “새로운 좌파세력이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는 마당에 실제 어떤 모습, 어떤 정책을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해야지 누가 더 왼쪽에 있냐를 두고 경쟁하는 건 국민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소모전일 뿐이에요.”

a 왼쪽 구석에 있는 빨간 책이 바로 이번 달, 12월 호

왼쪽 구석에 있는 빨간 책이 바로 이번 달, 12월 호 ⓒ 임김오주

잠깐. 그가 말하는 ‘극복의 대상’은 정작 말지의 성향으로 알려져 오지 않았는가. “제가 들어오기 전까지 말지는 소위 NL적 경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독일에서 살다 온 제 친구놈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동독보다 서독 내의 친 동독주의자들을 더 유심히 지켜봤는데, 동독보다 정치적으로 더 비참하게 무너졌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렇다고 다짜고짜 김성환씨의 생각대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노릇. 그가 그럴 성격으로도 보이지 않는데, 역시 “제가 생각하는 대로 들어오자마자 강요하면 분란이 일어날 것 같아서 꾸준히 계속 설득해왔죠. 어떻게? 술이죠. 정색을 하고 말하면 싸우게 되잖아요. 책 나오고 하면 술자리가면 언성 높아지기도 하죠. 그런 일이 거의 매달 있구요. 하하.”

그렇다면 ‘진보’언론은

이쯤 되니, 그에게서 ‘진보’의 개념은 ‘고정화된 세력’이 아님을, 유동성이 강한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을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들은 것 같다. 어제 진보주의자였던 사람이 오늘 보수주의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세력이나 진영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그가 이렇게 계속 강조에 강조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더 낳은 진보언론을 만들어 가기 위함이다. “벽을 허물고 보면 여러가지 새로운 현상들이 보일 수 있죠. 자기 나름대로의 창의성, 색다른 시도를 끊임없이 고민 해보자는 거예요. 글을 수단으로 보는, 잘 전달되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안일한 태도로는 발전이 없겠죠. 진보매체, 많이 읽히게 만들어야지요.”

덧붙이는 글 | 대학생신문 17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대학생신문 17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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