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미 [신중현 작품집 : 바람]배성록
수록곡
1. 바람
2. 추억
3. 비가 오네
4. 아름다운 강산
5. 불어라 봄바람
6. 어디서 어디까지
7. 나도 몰래
8. 당신의 꿈
9. 마음은 곱다오
10. 고독한 마음
CD로 재발매 되기 전까지, 김정미의 음반은 컬렉터들 사이에서 초고가로 거래되는 ‘귀하신 몸’이었다. 어떤 인터넷 게시판에는 100여만원에 김정미의 [Now]를 구입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니까. 그렇다고 해서, 김정미가 처음부터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데뷔 당시엔 김추자 클론으로 평가절하되고, 대마초 파동 이후에는 잠적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어느 절에서 은둔하고 있는 것을 봤다더라, 미국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더라 하는 소문만이 떠돌 뿐이다.
그런 면에서, 김정미에 대한 뒤늦은 관심은 올드 팬들에게는 일견 아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상황일 것이다. 대체 왜 사람들은, 정말 좋은 것은 한참 나중에야 발견하는 것일까. 비록 활동하는 동안에는 김추자의 그늘에 가린 감이 있지만, 사실 김정미는 누구보다도 신중현의 싸이키델릭 음악을 적확하게 구현해낸 가수로 꼽힌다.
그녀의 넓은 음폭과 요염한 음색은 이국적이고 기묘한 선율을 지닌 신중현 음악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더욱이 이정화 때처럼 밴드와 가수간 균형 조절의 실패도, 김추자처럼 여가수만 지나치게 부각되는 법도 없었다.
밴드는 김정미의 보컬을 중심으로 ‘반주’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고, 김정미는 그녀 나름대로 신중현의 색깔을 살리려 고심했다. [바람]과 [Now] 같은 역작은 그런 밴드와 여가수의 적절한 조화를 바탕으로 나올 수 있었던 셈이다.
커버 사진부터 싸이키델릭 그 자체인 [바람]은 또 다른 명반 [Now]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음반이다. 발매 시기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록곡과 음원마저도 7곡이 [Now]와 동일하다. 공교롭게도 이 음반이 먼저 CD로 재발매되는 바람에 팬들에게는 수록곡의 중복이 ‘돈 아깝다’고 생각하는 빌미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바람>과 <불어라 봄바람>은 신중현식 싸이키델릭 음악을 대표할 만한 곡들이다. 감정의 고조를 가급적 표출하지 않는 김정미의 보컬, 마이너이면서도 메이저인 듯한 느낌을 내는 신중현 특유의 멜로디, 그리고 이펙트 없이 생톤으로 반복되어 싸이키델릭한 감각을 배가하는 기타 연주. 특히 이런 묘한 고양감 때문에 <바람>은 금지곡이 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구체적인 금지 사유는 ‘창법 저속’이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추억>이나 <마음은 곱다오>와 같은 신중현식 가요들은 김정미가 김추자 아류로 취급받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김정미의 데뷔 자체가 김추자와 관련이 있는데, 소주병 난자 사건으로 김추자가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김정미가 대타로 나섰던 것이다.
당시 그녀가 선보인 육감적인 목소리와 현란한 춤사위는 즉각 ‘제 2의 김추자’라는 찬사 아닌 찬사를 받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추억>이나 <당신의 꿈>, <마음은 곱다오>와 같은 곡은 김추자의 [늦기 전에] 음반의 후광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고답적인 노랫말이나 고혹적인 음색 등이 김추자가 선보인 가요들과 흡사했던 탓이다. 결국 이런 문제들로 인해 김정미는 <봄>이나 <햇님>과 같은 역작을 선보이고서도 2인자의 설움을 맛봐야만 했다.
음반에서 <바람>과 함께 가장 매력적인 곡은 <나도 몰래>와 맨 마지막 곡 <고독한 마음>이다. 한국 전통음악에의 고민이 느껴지는 <나도 몰래>는 <잔디>등과 함께 신중현 싸이키델릭 음악을 대변할 만한 명곡이다. 또한 <고독한 마음>은 어두운 색조의 ‘소울 가요’라 할 만한데, 김정미의 음악 가운데 가장 슬픔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곡이기도 하다. 음반 내의 소울-싸이키델릭을 표방한 다른 트랙들에서 정작 보컬의 ‘소울풀’한 면모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반해, 이 곡에 한해서만은 다르다. 김정미는 곡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 낮고 우울한 톤을 유지하며, 소울풀한 감수성을 전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음반 이후에도 한동안 김정미는 신중현 사단의 대표적 주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 과정에서 <갈대>나 <담배꽁초>와 같은 명곡들을 연이어 발표하며, 김추자의 굴레를 벗고 독자적인 나래를 펼 채비를 갖추기도 했다. 그러나, 75년 개발 독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부터 김정미의 음악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언급했듯이 <바람>을 비롯해 <이건 너무 하잖아요>, <담배꽁초>, <너와 나>, <나비 같은 사랑>, <가나다라마바>등이 줄줄이 금지곡 판정을 받으며 김정미를 구석으로 몰아 넣었다. 이후 음악적 스승인 신중현이 대마초 사태로 구속당하면서, 아직 젊고 유약하던 김정미는 무너지고 만다.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불분명한 소식 외에는, 어떤 근황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 철저한 은둔으로 인해 오히려 신비성이 더해졌다는 시각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짧은 영화 뒤에 철저한 파경이 있었던 불행한 케이스라 하겠다.
그렇기에 김정미의 음악이 새삼 재평가를 받고, 2장이나 재발매된 최근의 상황 전개는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 때 그 시절과 지금은 여러모로 사정이 다르다. 그럼에도, 30년이 지난 지금 발견하는 김정미의 노래들은 감동적이다. 유행은 가고 정권도 가고 사람도 하나둘씩 떠나가지만, 어찌됐든 음악은 이렇게 살아 남아서 듣는 이를 즐겁게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왜 정말 좋은 것은 나중에야 발견하는가?”라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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