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 역사의 현장 - 광화문, 미대사관 앞 항의시위

등록 2002.12.09 15:30수정 2002.12.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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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촛불 추모제를 위해 애인과 함께 광화문에 갔다.
5호선 계단을 올라나오자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양초를 가득 쌓아놓은 노점상들이 초 하나를 컵에 끼워 1000원씩에 팔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추모의 촛불을 팔겠다고 노점상이 나올 정도라니…. 월드컵때 응원용품을 팔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과연 월드컵 응원에 버금가는 전국민적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으나 기분이 좀 찝찝했다.

양초 한 갑 6개들이가 우리동네에서는 천원이었다. 지난번 주중의 추모행사에 한 갑을 사갔는데 신부님들 단식투쟁하시는 곳에 놓고 왔기에 오늘은 다시 초를 사야 했다. 한개에 천원짜리는 사기 싫었고, 그래서 광화문 주변의 구멍가게들을 찾아나섰다.

한 곳에서는 먼저 초를 사려고 오신 아주머니들이 있었는데, 구멍가게 주인이 한 갑에 1500원을 불렀다. 음.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장삿속이 여기서도 발휘되다니. 작은 짜증을 뒤로 하고 다른 가게를 찾아나섰다. 결국 세군데서 헛탕치고 한 노인이 지키고 있는 가게에서 중간굵기의 양초 두개들이 한갑에 천원을 내고 샀다. 다음을 생각해서 한갑을 더 사두었다.

별스런 기분이다. 양초 품귀 현상이라니…. 어쨌든, 좋은 의미에서 우리 국민들이 이 추모제에 대해 엄청난 열기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찝찝함을 털기로 했다.

추모행사를 위해 교보문고앞에 갔더니 사람들이 막 모여들고 있었다.
저마다 초를 켜들고. 월드컵때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느끼던
동질감과 연대감을 반딧불같은 촛불의 빛으로 확인했다.

그때 뒤쪽에서 유인물을 한 트럭 실어온 사람들이 (범대위 소속 사람들 같았다.) "시민여러분! 이 유인물 접는 것 좀 도와주세요!" 라고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당연한 듯이 유인물을 한덩이씩 나눠받아 맨바닥에 자리를 잡고 반씩 접기 시작했다. 그 광경도 생소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함께 간 애인과 함께 주저앉아 접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친구를 기다리며 연신 전화를 주고받는 직장인들도 있었고,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접고 한쪽으로 모으는 광경은 정말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발성 그 자체였다. 작은 도움이나마 되고 싶다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은 커다란 감동이었다.

방송카메라들도 그 광경을 비추고 녹화하는 듯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접고 있던 세명의 친구들에게 물었다.

"뭐하는 분들이세요?"
"직장인이에요."
"세분다?"
"우린 친구사이에요."


"왜 여기 오셨어요?"
"촛불행사 참여할려고요."
"왜 이걸 접고 있나요?"
"그냥 지나가다가 접어달라길래 친구 기다리면서 접고 있어요."

그런 인터뷰가 있었다.. 흘낏 보니 한 여자분은 에구구 이런 옷차림 집에 들키면 안되는데 하면서 고개를 숙인채 카메라를 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웃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 우리가 거기 모인 이유는 그런 것이었다.

나와 애인은 함께 접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 자리가 좁아지자 나는 접고 애인은 유인물을 돌리기로 했다. 내가 열심히 접은 것을 옆에 선 애인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애인은 이런 데모나 집회에 참가하는 게 처음이었다. 함께 여중생 살인사건에 분노하면서 꼭 주말집회에 가자고 약속했고, 그날 낮동안 다른 일로 바빴고 감기기운도 있었는데 약속을 지켜 함께 왔는데 한꺼번에 여러가지 하게 된 것이다. 슬쩍 돌아보니 나름대로 진지하게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모습이 더욱 감동적이었다. 우리의 주말데이트가 이렇게 역사적이고 국민적인 현장에서 이뤄진 것은 월드컵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저녁 6시가 되어가자 종묘에서 집회를 마친 사람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광화문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격다짐처럼 도로를 막고 있던 경찰들도 종묘쪽의 대열이 도착하자 도로를 내주었고, 순식간에 광화문네거리의 한쪽이 거대한 촛불바다로 변해버렸다. 나와 애인도 함께 그 대열에 묻혀 광화문네거리쪽(=대사관에 가까운 쪽)으로 앞서나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집회는 다양한 구호와 노래 속에서 진행되었다. 찬바람이 몰아치면 깃발들이 힘겹게 휘청거리는 추운 날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감싸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기대면서 그날의 집회는 따뜻하게 진행되었다.

집회가 진행될수록 인파는 불어만 갔다. 종로를 넘쳐나서 더이상 그 자리 에서 구호만 외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군데군데서 경찰들과 길을 내달라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추모집회의 참여인원이 사람의 바다를 이뤄 얄팍한 경찰의 방파제를 수시로 밀어내며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 옆쪽의 경찰대열과 주변사람들간에도 밀고 밀리는 실랑이 가 벌어졌다. 참여자가 많아 길을 더 내줘야만 하는데도 경찰들은 지휘에 따라 "밀리지마, 밀리지마"라는 나름의 원칙에 충실하려고 했다. 결국 사람의 바다는 경찰들을 밀고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내 주변에서도 사람들이 경찰들을 밀기 시작했을 때, 이런 집회에 처음 와본 애인은 사람들 틈에 밀려서 무척 당황하고 놀라기 시작했다.
나는 경찰을 밀면서도 애인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해서 양쪽을 신경써야 했다.

한순간 참여자들의 기세가 거세게 경찰들을 밀어내고 대열이 넓어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밟히고 부딪치는 건 당연. 애인의 신발끈이 사람들에게 밟혀 끊어져 버렸다. 발등을 가로지르는 끈이 떨어져, 잘못해서 신발이 벗겨지면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애인은 놀라고 당황했지만, 신발을 잘 지켜냈다. 나는 어쩔수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무척 미안했다. 평소 선물도 자주 못하고 신발 사준 적 도 없는
데 이담엔 내가 신발 하나 사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애인은 괜찮다고 말했고, 놀란 기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집회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앞으로도 이런 데이트 다시 할 수 있을까? 분위기 잡고 편안하게 대화하는 데이트만 생각했었다. 나중 얘기지만 그래도 14일에 다시 참여하기로 약속했다.

집회중 내내 이순신장군 동상 옆쪽에 있던 경찰 지휘차량은 질서를
지켜달라는둥 인도로 올라가 달라는둥 형식적인 경고방송을 내보내서
참여자들의 귀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그당시 그래, 인도로 올라가자 라고 결심했다고 해도 인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수십분이 걸릴 만큼 사람의 바다는 거리를 가득 메워있었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핀잔이었다.

한번은 경찰이 똑같은 경고방송을 하려고 하자 한꺼번에 거대한 A~, C~ 등의 짜증과 욕설을 동시에 내보내 경고방송을 뚝 멈추게 만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자잘한 승리에 서로 실소와 미소를 주고받으며 집회대열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곳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회가 8시무렵에 다다르자 사람들은 반복적인 연사들의 등장에 반대하며 "대사관, 대사관"을 외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며 투지가 불타기 시작했다. 대열은 이미 광화문 네거리를 절반이상 점거하고 있었다. 대사관을 향해 행진하기로 정해지자 대열은 광화문 네거리를 가로질러 완전히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대열 중간중간에서는 "왼쪽, 왼쪽" 이라는 말을 서로 전달하면서 거대한 대열이 한사람처럼 왼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시위대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궁금하신 분이라면 이런 광경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앞으로, 앞으로" 또는 "뒤로, 뒤로" 하면서 간단한 동작의
지침을 서로 앞뒤로 옆으로 전달하면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나처럼 움직인다는 데는 그런 비밀이 있었고, 그런 지침을 서로가
잘 지키기 때문에 오합지졸이 아니라 진지하고 거대한 한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드디어 왼쪽와 앞쪽을 수시로 밀어부치면 대열들 중 왼쪽 끝에서 경찰의 방어선이 뚫렸다. 깃발 몇개가 시원스럽게 경찰저지선 뒤로 펄럭이면서 이순신장군 동상 앞을 돌아 대사관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신속하게 대사관쪽으로 진격해나갔다. 빠른 움직임일 때는 "질서,질서"를 연호하며 우왕좌왕하거나 걸리는 일 없이 한쪽으로 나아가는 모습. 다시한번 신속하고 거대한 하나의 물결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쪽이 터지자 물밀듯이 쏟아져나오는 인파를 경찰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서 억지로 막아섰다가는 경찰도 참가자들도 다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곧이어 반대편에서도 경찰벽은 뚫리고 깃발을 앞세운 행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대사관을 향해 밀어부치기 시작한지 약 이십여분이 못되어 3만이 넘는 인파가 대사관 앞을 점령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감격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수없이 데모해봤지만 미대사관 앞을 점거한 것은 처음이라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야 이게 제2의 6월항쟁 아니고 뭐냐 면서 옆사람들에게 상기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저마다 감격의 정도는 다르더라도 성역처럼 여겨져온 미대사관 앞을
점령했다는 승리의 감격은 모든 참가자들에게 새롭게 힘을 불어넣는 듯 했다. 목소리와 함성은 더욱 거세지고...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광화문에서 시위한다고 해도 교보문고 앞 같은 곳에서 하면 미대사관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데, 우리가 정당한 요구를 그렇게 숨듯이 한구석에서 해야만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은 수많은 나라들이 있는데 그들이 다 미대사관처럼 상시철통경비를 받고 있는가? 아니라면 이유는 우리국민이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새로운 대통령은 미대사관의 상시철통경비를 즉각 풀어야 한다.
미국이 경비강화를 요구하면, "한국인에게 혼날 짓을 하지 않으면 된
다"고 당당히 말해줄 수 있는 대통령, 그런 대통령을 원한다.
또한 그렇게 기본적인 경비만 해주고 사고가 났을 때는 우리나라 법에 따라 사고친 사람들을 체포해서 공정한 재판을 거쳐 판결을
해주면 된다. 미국이 우리에게 특혜를 주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미국에 다른 나라와 똑같은 대접을 해줘야 한다. 쩝..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쨌든, 그렇게 그날은 승리의 감격과 승리의 예감이 광화문에 넘쳤다. 또한 꼭 승리하자는 약속이 더욱 굳게 맺어진 자리이기도 하다.
14일 더 큰 승리의 함성으로 그곳에서 월드컵 이상의 단합된 국민의 힘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아니, 그 전에도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꾸준히 교보 앞에서라도 숨어서 한다는 자괴감을 떨치고 지속적인 항의와 요구를 펼쳐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부시는 고개숙여 사과할 수밖에 없고, 소파는 다시 개정되어 일본도 독일 도 못가진 세계에서 가장 공정한 주둔군지위협정으로 태어날 것이다.그게 싫다면 미국은 그냥 떠나야겠지. 사실 미국없이도 우리민족의 평화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이런 시위들 이 똑똑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거대한 국민의 힘. 민족의 힘이 있는데 아직도 미국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시대의 변화와 국민의 성장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승리감으로 충만한 추모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손에 들린 타다 만 양초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월드컵때 붉은 옷과 응원도구 로 치장된 사람들을 그런 눈길로 보았었다. 국민의 힘... 소리없이 전해지는 승리의 약속을 사람들이 믿기 시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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