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남아있는 20%에게

드디어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기쁨의 87년을 회상하며

등록 2002.12.13 02:12수정 2002.12.1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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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6대 대통령선거 벽보

16대 대통령선거 벽보 ⓒ 임성훈

YWCA가 12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학생 중 80%가 '이번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실제 투표율이 이에 미칠 지는 미지수지만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20대의 높은 선거 참여율이 예상된다. 2030 유권자 네트워크의 출범, 대학 내 부재자투표소 설치 운동 등 젊은 층의 정치 무관심에 대한 내외적인 각성이 20대를 투표소로 향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는 날 스키장을 찾거나 방안에서 PC게임으로 하루를 소진할 대학생도 여전히 20%나 남아있다. 애초 정치에 무감각한 정치적 맹인, 한때 정치에 많은 기대를 가졌으나 곧 실망하고 돌아선 정치 혐오증 등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이유는 갖가지일 것이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이들 20%에게 옛날 얘기를 하나 들려주려 한다.

지난 87년 6월,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이들의 함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당시 필자는 전두환 정권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사람들이 왜 거리로 뛰쳐나갔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는 87년 6월과 그 해 12월 치러졌던 대통령 선거의 풍경을 꽤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기억이 생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자주 모여 민주화 항쟁을 전개했던 제주시민회관 광장이 우리 가족이 사는 집과 지척이었기 때문이다. (참고: 필자는 태어나서 고교 졸업까지 20년을 제주에서 자란 제주도 토박이다.)

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외치고 있는지, 전경들은 왜 최루탄을 터뜨리는지, 그 이유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집 근처에서 허구한 날 최루탄 가스가 터지니 무더운 여름날 창문도 열지 못하고 선풍기 바람으로 겨우 땀을 말리며 힘들게 잠을 청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철없는 중학생에게 민주화 시위는 메칸더V의 합체과정보다도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지만, 시위대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시민들도 시위현장을 지나갈 때마다 "잘한다. 잘하는 일이야!"라며 시위대에 응원을 보냈고, 주변 시장 상인들은 "먹고 힘내라"며 간식거리를 갖다주기도 했다. 결국 시민들의 힘은 6.29 선언을 이끌어냈으며, 그 해 12월 국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87년의 감동을 가끔 현재에 이입시켜 보곤 한다. 만일 군사정권이 지속됐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2002년 6월에 민주화의 물결이 넘치고 이번 대선이 헌정사상 처음 치러지는 대통령직선제라면? 이런 공상을 하고 있으면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희열감에 가슴이 떨리곤 한다. '보라! 드디어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다. 그 잘난 높으신 어른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고를 수 있다 말이다!'

필자는 지난 87년 이러한 감격을 본인의 부친에게서 본 적이 있다. 13대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12월의 어느 날, 부친과 부친의 친구 분이 함께 탑승한 택시에서 대선 얘기가 피어올랐다. 당시 아버지와 친구 분은 김영삼 후보 지지자였고, 택시기사는 노태우 후보 지지자였다. 짧은 거리를 주행하는 사이에 택시기사는 "아, 글쎄 대통령은 보통사람이 돼야 합니다"라며 노태우 후보를 치켜세웠고, 부친과 친구 분은 "보통사람이니까 대통령하면 큰일나지"라며 김영삼 후보의 지원유세를 펼치는 등 옥신각신 설전이 오갔다. 그러나 그 설전은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싸움이 아니었다.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가에 상관없이, '어쨌든 너도 한 표, 나도 한 표'라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축제였다.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아버지가 택시요금을 건네려는 순간 그 택시기사는 "잔돈은 안받을테니까 노태우 한 표 찍어주세요"라며 인심을 썼다. 이에 필자의 부친은 "어쭈, 자네 내가 5천원 더 얹어줄테니까 김영삼이 찍어주셔"라며 응수했고, 한바탕 호방한 웃음이 오갔다.

이만큼이나 즐거운 삶의 기쁨이 어디 흔하겠는가. 40년, 50년, 또는 그 이상을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드디어 나라님을 자신의 손으로 고를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것이다. 백성에서 시민으로, 정치적 객체에서 주체로, 수동태에서 능동태의 국민으로 거듭난 희열감이 가득한 12월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그리고 현재 채 30줄에 들어서지도 않은 필자가 이런 얘기들을 풀어놓는 것이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분명한 건 대통령을 내 손으로 직접 뽑는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는 사실이다. 지난 87년, 사람들은 얼마나 기뻤을까. 또 얼마나 즐거웠을까.

지금 과감하게 한 표를 포기하려고 작정하신 분들에게 그 권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우리의 선배들이 고생했는지 한번쯤 되새겨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 한 표의 희열감을 음미해 볼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87년 이후로도 정치는 국민들에게 배신감만을 안겨주며 무관심과 혐오증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드디어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희열감을 망각하기에 15년이란 세월은 좀 짧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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