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 버리면 모두가 아름답다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8)

등록 2002.12.21 08:28수정 2002.12.2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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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부전선 최전방에서 군 복무할 때였다. 어느 봄 날, 내 앞으로 난데없이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발신지는 충남 한산 어느 시골이었는데 발신인은 도시 알 수 없는 여자의 이름이었다.

존경하는 소대장님께


…오빠가 입대하기 전에는 세 식구가 단란하게 살았는데 지난해 가을에 오빠가 입대한 후, 어머니는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해서 두 달 전부터 병석에 누워 계십니다. 병석에서 매일같이 오빠만 부르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생각다 못해 소대장님께 하소연을 드립니다.

소대장님, 제 오빠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집에 보내주실 수 없는지요? 어쩌면 어머니가 오빠를 부르시다가 돌아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대장님! 어머니의 소원을, 이 소녀의 애원을 꼭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오빠가 오실 날을 저희 모녀는 학수고대하겠습니다.…….


나는 편지를 단숨에 읽고서는 마음이 찡했다. 편지의 주인공은 우리 소대 한(韓) 이병의 여동생이라고 했다. 한 이병은 논산훈련소에서 보충대를 거쳐 한 달 전 에 전입해 왔다.

그는 아주 순박하게 생긴 녀석으로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입대했다. 한 이병을 불러 집안 사정을 물었더니 편지 내용과 일치했다. 나는 그 편지를 들고서 곧장 중대장실로 갔다. 중대장은 내가 건네준 편지를 읽는 둥 마는 둥 시큰둥했다.

"중대장님, 한 이병 특별휴가 좀 보내주십시오."
"안 돼요. 관보가 아닌 이상 보낼 수 없어요. 그런 편지 한 장으로 휴가 보내다가는 부대가 텅 빌 거요. 그냥 묵살해 버려요."
"그냥 뒀다가 탈영하면 어쩝니까?"
"그건 본인의 책임이오."


내 건의를 무 자르듯한 중대장이 야속했다. 나는 대도시 출신의 학벌 좋은 닳아진 녀석이라면 몰라도 시골 출신으로 어벙한 한 이병의 경우는 절대 거짓이 아닌 걸로 믿었다. 나는 몇 차례 더 간청을 했지만 끝내 묵살되었다.
"박 소위는 인정에 약하단 말야. 그게 당신의 큰 흠이요."

그 후 열흘만에 그 소녀로부터 또 편지가 날아왔다. 종전의 내용보다 더 긴박했다. 나는 다시 그 편지를 들고 다시 중대장을 찾았지만 저번보다 더 핀잔만 들었다.


그 무렵 우리 중대 뒷산 관측소에 국방장관이 시찰올 예정이었다. 대대장은 장관이 온다는 예정일 이틀 전부터 아예 우리 중대로 출근하여 진두 지휘했다.

나는 선임 소대장으로 오줌 누고 뭐 볼 새도 없이 일했다. 장관이 부대와 관측소를 둘러보고 만족한 얼굴로 떠난 후, 대대장이 나의 노고를 치하하기에 바로 그 틈을 이용해서 한 이병 휴가 문제를 건의했다.

"그래? 그 자식 내일 대대 인사과로 보내."
"공격! 감사합니다."

이튿날 한 이병은 소대원들의 부러움 속에 보름간의 휴가증을 받아 고향 길에 올랐다.

그가 떠난 지 며칠 후 어느 날 밤 소대 내무반장 김 하사가 내 방으로 와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낯익은 글씨였다. 발신인이 바로 그 소녀였다.

"어쩐지 낌새가 이상하기도 했고, 혹시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나 하는 염려로 편지를 뜯어 보았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편지를 펼쳤다.

사랑하는 ㅇㅇ 씨

… 왜 안 오세요. 자기가 시킨 대로 소대장 앞으로 두 차례나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로 안 되나요? 다른 방법을 알려주세요.…."


나는 더 읽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한 이병, 너 귀대만 해 봐라. 내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영창? 아니 영창보다 더 큰 벌을 줄 테다. 그를 너무나 우직스럽게 봤던 내가 어처구니없게 우롱 당한 셈이었다.

그의 귀대 일이었다. 아침부터 벌 줄 궁리만 했다. 온종일 분이 삭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녀석은 해가 지도록 귀대를 하지 않았다. 밤 9시, 10시……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졌다. 내 귀는 온통 출입문에 쏠렸다. 11시, 그래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 날 야간 근무를 나가지 않은 소대원들을 일단 취침시킨 후, 나는 내무반 옆 내 방으로 가서 램프를 켜둔 채 근무복장 그대로 책상에 앉아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11시 30분, 그때까지도 인기척이 없었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이 자식 미귀(未歸)하는 게 아냐? 그에 대한 분함이 이젠 불안감으로 바꿨다.

'내 벌 안 줄 테니 제발 오늘 내로 귀대만 해 다오' 나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새 중대 행정반에서 몇 차례 연락이 왔다. 대대 상황실에서도 귀대 확인 전화가 왔다. 돌아오는 대로 즉시 보고하라고 했다.

12시 10분전, 그제야 인기척이 났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내무반장 김 하사와 전령도 그때까지 초조히 기다렸나 보다. 빨리 소대장실로 가서 귀대 신고하라고 내무반장이 일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들어 와!"
"공격!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는 경례가 끝나자마자 주머니에서 청자 담배 한 갑을 꺼내 얼른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걸 그를 향해 집어던지며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순간 나는 이성을 찾았다. 내가 양보하자. 내가 참자.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런 연극을 꾸몄을까?

그 방법이 나빴지만, 뜨거운 사랑 앞에는 부모도 조국도 없다고 하지 않은가! 지금 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곳을 찾았으리라. 꿈같은 휴가의 여운을 이 밤에만은 깨뜨리지 말자.

"가서 자!"
"공격! 돌아가겠습니다."
중대 상황실. 대대 상황실로 귀대 보고를 하고 중대장 숙소로 전화를 돌렸다.
"공격! 중대장님, 한 이병 방금 돌아왔습니다."

"그 자식, 촌놈이 보통 아니야. 귀대하는 날 밤 12시 직전에 들어온 걸 보니까. 어때, 박 소위 속은 거 아냐?"
"아- 아닙니다. 중대장님."
"알았어요. 자, 그만 잡시다."
"네. 공격!"

밖에서 내무반장의 성난 음성이 들렸다.
"새까만 졸병 놈의 새끼가 겁도 없이……."
한 이병을 단단히 벌 줄 모양이었다.
"김 하사! 그만둬."
"네. 알았습니다."

며칠 후 야간 경계 근무 순찰 중에 그의 초소를 찾았다.
"한 이병, 휴가 중 재미 많이 봤어?"
"네, 덕분에……."
"꼬질대에 물집 생기지 않았어?"
그는 대답 대신 고개 숙인 채 히죽히죽 웃으며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둑에는 봄바람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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