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그 후 - 1] 기성 세대의 패배감, 그리고 치유

그분들 손을 꼭 잡고서

등록 2002.12.21 11:01수정 2002.12.2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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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대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이 막 시작되던 6시 무렵, 출구조사 결과를 미쁘게 받아들이며 길을 나섰다.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남은 개표 과정을 지켜볼 터였다. 어두운 하늘도 밝게 느껴지고 쌀쌀한 날씨도 포근하게 여겨지는 묘하게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필자의 이런 기분과는 별개로, 동네 어른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우거지상이었다. 뭣 씹은 듯한 얼굴들이 대부분이었고, 흡사 한나라 당사에 앉은 의원들마냥 일말의 기대와 초조함에 젖어 있었다. 그제서야, 이번 선거가 유난히 세대간 대결이 첨예한 선거였음이 떠올랐다.

기성 세대가 왜 노 당선자를 꺼렸는지, 그리고 왜 이회창씨에게 ‘묻지마 지지’를 보냈는지는 논외로 하자. 당사자들이야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다 끝난 마당에 새삼 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분들이 느끼고 있을 패배의 감촉이다.

이젠 대통령마저도 자신들이 만들 수 없다는, 다 젊은 애들에게 내주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낭패의 감각이다. 이건 문제다. 대통령이 이회창이 되건 장세동이 되건, 우리 부모 세대가 이런 느낌에 사로잡혀 5년을 보낸다면 죽도 밥도 뭣도 되지 않는다.

기성 세대의 이런 느낌은 단순히 이번 선거에서 갑작스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컴퓨터의 등장, 사회의 급속한 변화, 물질 문명의 확산… 온갖 요소들이 휘황찬란하게, 신묘막측하게 세상을 뒤엎고 뒤집고 도로 메쳤다. 장년층은 여기에 적응할 시간도, 유연해질 마음과 정신의 여유도 없다.

장년층은 젊은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란한 래핑과 브레이크, 토마스 같은 안무를 따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난 ‘정몽준 사태’ 때처럼 밤새워 가며 인터넷을 통해 발빠르게 대처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누군가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고 광화문에 수만 명이 모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국어 파괴 현상인 ‘아햏햏’에 열광하는 것도, 롯데리아 점원 아가씨 팬클럽이 결성되는 것도 도저히 납득이 힘든 현상들이다. 그들에게는 올 한해 젊은이들이 벌인 온갖 대형 사건들이 도저히 이해하거나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돌출 현상처럼 여겨질 터이다.

문화일보 도올 김용옥 기자의 20일치 칼럼은, 그가 내로라 하는 지식인임에도 네티즌과 젊은층의 새로운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쟁을 겪고 새마을 운동을 거친 대부분의 기성이 대부분 그럴 것이다.


우리들의 찌그러진 작가 이문열은 19일 개표 방송을 지켜보며 술에 진탕 취했다고 한다. 한겨레 김훈 기자에게 그는 “붉은 옷을 입고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젊은 애들을 신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그가 특별히 일그러진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다. 동네에서 뭐 씹은 표정으로 술 마시던 아저씨들도 그랬을 것이고, 제발 이회창 찍으라고 필자의 친구에게 강권하던 50대 아주머니도 그랬을 것이며, 김대중 정부 들어 간첩 잡은 것 못 봤다는 대학 교수도 그랬으리라.

젊은이들은 갈수록 그들과 멀어져만 간다. 당장 집에서만도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들과는 도통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꽉 막힌 그들과는 할 얘기도 별로 없고, 정작 얘기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부분 젊은이들의 생각일 것이다. 조선일보를 보고, 빨갱이 타령에 아직도 고개를 끄덕이고, 물질적 안정에만 천착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추구하는데는 무심하거나 포기한 부모 세대가 ‘혐오스럽다’는 젊은이도 있다.

‘누구 찍으면 등록금 끊어라’ 내지는 ‘50대와 20대가 연합해 30대를 고립시키자’는 따위 주장을 하는 그들 세대를 한심스럽게, 경멸하듯 쳐다보는 이들도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던 선거전이기에, 그리고 서로를 ‘악’으로 몰아붙이며 첨예하게 갈등했던 선거였기에 그 앙금은 쉬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적이 아니다. 이회창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악마니 파쇼니 하는 극렬한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민주 국가도 아무 것도 아니다.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부모님들은 어린 시절부터 전쟁 속에 배고픔을 겪고 자랐고, 박통의 인도 하에 물질적 가치가 최고라는 세뇌를 당하며 살았다. 조선일보가 민족 정론이라고 믿으며 자라왔고, 빨갱이는 때려 죽여야 할 증오의 대상이라고 교육 받으며 자랐다.

그들은 ‘피해자’이다. 그리고 우리의 부모이고 이웃이고 선생이고 친척이며 ‘동료 인간’이다. 정치적 지향점과 세계관이 조금 다를 뿐, 5년간 또 함께 살아나가야 할 한 나라 사람들이다. 들끓던 증오와 적개심과 경멸 같은 감정은 그들이 아니라, 역사와 과거의 통치자들과 인간의 한계에 돌려야 한다.

그들이 젊은이들을 죽어라 따라잡으려 해도, 아무리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패배주의에 휩싸여 있다. 이젠 ‘대통령’조차도 자신들이 만들 수 없다는, 젊은 애들에게 다 내주고 죽을 날 기다리며 돈이나 벌어야겠다는 당혹과 허탈함에 사로잡혀 있다.

개인적으로 동아일보 ‘나대로 선생’이란 만화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20일자 만화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에 와 닿았다.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 기성 세대가 쓸쓸하게 음식점에 들어선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 그에게 젊은 종업원은 “젊은층이 좋아하는 걸로 드세요”하고 말한다. 기성 세대는 “별 수 없군” 하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며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하고 되뇐다. 현재 모든 부모 세대가 겪고 있는 아픔과 좌절을 잘 대변해주는 만화라 할 것이다. 그 뒤에 깔린 정치적 의도는 차치하고서라도.

동아일보 12월 21일자 나대로선생
동아일보 12월 21일자 나대로선생동아일보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것은 결코 옳지도, 바람직하지도 못하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기성 세대와 젊은 층은 대립의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 대화, 타협의 관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부모이자 이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가 지금 무슨 케케묵은 삼강 오륜 설을 푸는 게 아니라, 당연한 시민 사회의 상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 부모와,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와, 학교 교수와 대립하고 싶지 않다.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다면 토론해서 이해를 구하고, 그들이 서운해하는 부분이 있다면 수용하고, 그렇게 같이 나아가고 싶다. 내내 역사의 피해자로 일만 하며 살아온 그분들이, 아무런 개인적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식 자라는 모습에 온 기대를 걸어온 그분들이 “우리가 무슨 힘이 있나”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은 보기도 싫고 보지도 않겠다.

선거 때문에 부모와 대립한 젊은이가 있다면, “새 대통령은 죽어도 싫다”는 부모님 밑에 있다면, 지금이라도 집에 가서 부모님 손을 한번 꼭 잡아드리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분들에게 사려 깊고 따뜻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 드려 보는 것은 어떨까.

“엄마, 그래도 엄마 세대가 고생해서 얻은 민주주의로 뽑힌 대통령이잖아. 그리고 엄마 딸이 충분히 살펴보고 찍은 사람이잖아. 게다가 엄마랑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년배잖아. 그러니까, 좀 맘에 안 들더라도 이쁘게 봐주면 안될까? 얼마나 잘 하는지, 좋은 점은 없는지, 같이 감시하면 안될까?”

그렇게 손을 꼭 맞잡고서, 그렇게 말씀 드려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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