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새끼도 주인을 알아보고 섬기는데 하물며..."

지난 28일 개최된 반탁승리기념대회에 참가하신 우익인사들을 위로(?)하며....

등록 2002.12.31 05:17수정 2002.12.3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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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누군가가 "정말 열받는다"며 퍼나른 글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그 글은 <오마이뉴스> 공희정 기자가 1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57회 반탁승리기념대회를 취재한 기사("반미운동 주도 친북세력 타도해야", 2002.12.28)였는데, 무명의 네티즌의 머리에 스팀이 돌게 만든 것은 그곳에서 내뱉어진 몇몇 우익인사들의 발언이었습니다. 문제의 발언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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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반미운동 주도 친북세력 타도해야"

"이북과 연결된 국내 세력이 촛불시위를 통해 반미를 조장하고 있다... 미군보고 나가라는 것은 역적"(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의장)

"여기 계신 분들도 젊었을 때 미군병사 만나면 구세주를 만난 양 얼마나 좋아했느냐... 개새끼도 주인을 알아보고 섬기는데 하물며 우리를 지켜준 미군보고 이제는 볼일 다 봤으니 나가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대한헌정회 유치성 회장)

"민족보다는 국가가 우선... 미국에 배은망덕한 국민이 되어서는 안된다"(대한민국건국회 손진 명예회장)


어떻습니까? 정말 열받을 만하지요? "이북과 연결된 국내세력이 촛불시위를 통해 반미를 조장하고 있다"니, 요즘엔 빨갱이들이 총 대신 촛불을 드나 봅니다. 그나저나 촛불을 든 빨갱이들(내지는 역적들)이 날이면 날마다 서울의 심장인 광화문 네거리를 점거하고 있는데도 이철승씨는 국정원에 신고하지 않고 뭐하나 모르겠습니다. 진짜 우익인사 맞아?

그러나 이날의 진짜 히트작은 "미군병사=구세주" 운운하며 "개새끼도 주인을 알아보고 섬기는데 하물며 우리를 지켜준 미군보고 이제는 볼일 다 봤으니 나가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인 유치성씨의 말입니다. 유씨의 용감무쌍한 신앙고백 앞에서 독설깨나 푼다는 내 손가락도 달리 대응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개새끼보다 못한 인간'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친해하는 대한국민 여러분, 우리는 개새끼요, 주한미군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고마운 주인입니다. 개새끼보다 못한 인간이란 소릴 듣지 않으려거든, 주인이 우리를 몽둥이로 때리든 깔아 죽이든 그저 순종 복종 굴종합시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로(!) 주한미군에게 나가란 말 하지 맙시다.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인데, 개새끼 주제에 그들더러 나가라 마라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정말 개소리 아닙니까?

후, 가슴이 시리다 못해 웃음이 나옵니다. 그렇지요. 웃을 도리밖에요. 늙으신 분들에게 화내서 뭐하겠습니까? 문득 일전에 읽은 한시 한 수가 생각납니다. 조선 선조 대의 문신 이산해(李山海, 1538~1609)가 지은 '차옹'(此翁)이란 시인데, 속을 가라앉히는 셈치고 잠깐 들어보시겠습니까?

화개일여야승기(花開日與野僧期)... 꽃피면 날마다 스님과 즐거이 놀고
화락경순엄죽비(花落經旬掩竹扉)... 꽃지면 사립닫고 나오질 않아
공설차옹진가소(共說此翁眞可笑)... 사람들은 말하기를 "웃기는 노인"
일년우락재화지(一年憂樂在花枝)... 노인은 말하기를 "꽃밖에 없어"


시에 등장하는 노인은 낭만이 대단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영화 '죽어도 좋아'에 나오는 정열적인 어르신 같다고나 할까요. 남이사 뭐라 하건 말건 한평생 꽃에 취해 사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이렇듯이 반탁승리기념대회에 참석하셔서 몇 자 늘어놓으신 어르신들도 필경 미국이란 꽃에 취하신 게지요. 마지막 행을 이렇게 바꿔 읽으면 어떻습니까?

평생우락재미국(平生憂樂在美國)... 평생의 즐거움이 오로지 미국 밖에 없어

어때요, 딱 들어맞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공 기자가 쓴 기사 말미에 보니까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해서 김용갑, 박명환, 박세환, 신경식 의원과 박관용 국회의장 등이 보낸 화환들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더군요. 글을 맺기 전에 예의상 이분들에게 축하의 말이라도 한 마디 해야 할까 봅니다.

"님들은 참 좋겠습니다. 개새끼보다 나은 인간들이라서..."

덧붙이는 글 | 하니리포터에도 송고한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하니리포터에도 송고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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