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잡아줬던 두더지

등록 2003.01.03 20:37수정 2003.01.0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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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이었습니다. 일요일이면 늘 그랬듯이 그림 그리는 아이들이 사랑채 저 아래에서부터 "선생님!" 소리치며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그새 제 키보다 훨씬 커버린 해바라기에 "와!" 놀래며 신기하게 바라보다가도 늘 그랬듯이 병아리들처럼 집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털보 아저씨! 여기 좀 와 보세요!"

외양간을 수리해서 만든 아내의 엉성한 화실 한켠에 죽은 두더지 한 마리가 가지런히 누워있었습니다. 머리 부분이 무언가에 치명적으로 물려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두더지가 처음엔 아주 이쁜 인형인줄만 알았답니다. 두더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융단처럼 부드러운 털이며 작고 뽀족한 주둥이하며 앙증스런 발바닥이 요즘 아이들이 책가방 끄트머리에 달랑달랑 매달고 다니는 햄스터를 닮아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 귀엽게 생긴 것이 인형이 아니고 본래 생명체였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입니다. 주검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 그런 본능적인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두더지를 죽여 화실에 옮겨놓은 범인은 우리집 고양이, '야옹이'가 분명했습니다. 아침나절 '야옹이'가 오이, 토마토, 고추, 옥수수 등을 고루고루 심어놓은 채소밭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뭔가를 열심히 쫓고 있었습니다.

평소처럼 개구리나 벌레를 쫓아 다니겠지 싶어 관심을 끄고 있었지요. '야옹이'는 쥐는 물론이고 얼마 전에는 뱀도 잡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올해로 3년째 우리 집에 대를 이어 드나들며 우체통에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새끼를 길러내던 딱새조차 쫓아냈답니다. 아, 그리고 또 어미 닭이 모이도 제대로 못 먹어 가며 뼈 빠지게 부화시킨 병아리를 죄 잡아먹은 싹수가 노란 놈이기도 합니다.

"아저씨! 이거 얼른 갖다 버리세요!"

아이들은 두더지를 버리라고 성화였습니다. 저는 그림 그리는 아이들의 부모님들과 함께 두더지의 부드러운 털을 만져 가며 어릴 적 얘기를 해줬습니다.

"이거 삶아 먹으면 얼마나 좋은데, 우리 어릴 적에는 보약이었어, 보약…."

30여년 전, 울 아버지는 이른 새벽 밭일을 나가셨다가 가끔씩 덫에 걸린 두더지를 산내끼에 묶어 달랑달랑 들고 오시곤 했습니다. 주먹잽이 큰형을 쟁기에 묶어 비탈진 산을 깎아 밭을 일구시던 아버지. 그런 소중한 밭작물을 죄 파헤쳐 놓던 두더지를 잡아오시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는 두더지가 밉기도 했지만 7남매 자식들에게 먹일 보약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침 흘리는 아이에게 좋다는 게 두더지였으니까요.

우리 형제들은 작은 양은 냄비에 삶아 놓은 두더지를 서로 먹으려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결국은 유난히 침을 많이 흘리던 동생 차지가 되곤 했지만 털을 말끔히 벗겨내고 소금에 찍어 뼈를 쪽쪽 빨아가며 살을 발라먹었지요.

이제는 먹고 살만한 세월이라 그럴까요, 아니면 우리 식성이, 몸뚱이가 진저리쳐질 만큼 자연에서 멀어져서 그럴까요. 지금 생각하면 냄비 가득 죽은 쥐 한 마리가 둥둥 떠 있는 것이나 진배없는 그런 진저리쳐지는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쏙 빼고 아이들에게 알짜만 말해줬지요.
"두더지는 깨끗한 곳에서만 살아, 아주 깨끗한 동물이야, 오염된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단다. 예전에는 없어서 못 먹었어...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서로 먹으려고 난리였단다."

아이들 부모님도 거들었습니다.
"큰딸이라서 두더지는 동생들 차지였는데, 옆에서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얘들아, 이 털 한번 만져봐라, 얼마나 부드럽나."

미제라면 질색을 하는 아이들, 반미운동가를 동요처럼 부르는 우리시대의 참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두더지 찬양에 홀딱 빨려들어 손으로 매만지고, 나중에는 삶아 먹고싶다는 말까지 나왔답니다.

아이들은 단순해서 참 좋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스럽게 다가왔던 두더지의 주검은 더이상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신비하거나 귀여운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그랬듯이 그저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먹기엔 좀 곤란할 것 같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하늘이, 땅이, 사람이 오염되어 있어, 두더지를 먹기에는 불안한 시절입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먹고사는 것은 분명 탈이 나게 되니까요.

결국 아이들은 땅을 파야 했습니다. 그 옛날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먹였던 보약, 두더지를 묻어 주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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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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