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엄마가 사라지던 날

나의 울음과 고함소리는 아파트단지 가득 울려퍼졌지만 -

등록 2003.01.03 19:13수정 2007.06.1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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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을 마치고 고속도로를 마구 달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열시 반부터 돌아오는 차 안에서까지 스무번도 넘게 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추운 밖에서 떨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얼마간의 불안감을 애써 뒤로 미루고 '주무실 거야'라고 위로하며 차를 달렸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현관 앞에 차를 세우고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섰다. 거실의 TV와 불은 모두 켜져 있었다.

"엄마 -"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방마다 문도 열어보고 화장실과 베란다도 찿아 보았지만 엄마는 없었다. 치매와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는 엄마에게 언젠가는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이 3년이 다된 지금 벌어진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언니한테 전화를 했다.

"언니, 엄마가 집에 없어."
난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엉엉울기 시작했다. 나의 단 한마디에 모든 상황을 알아들은 언니는 '곧 간다'며 전화를 끊었다. '혹시 앞집에서 보호하고 있지 않을까?'하는 간절한 기대를 하며 앞집의 벨을 다급하게 눌렀다. 모니터로 사색이 되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 앞집 애기엄마는 얼른 문을 열었다.

"저희 어머니 못 보셨어요?"
"아니요. 아니 어쩌지요? 아휴 어쩌면 좋아"라며 사태를 눈치챈 애기엄마는 안타까워했다.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뛰어나와 차를 끌고 아파트 단지를 한바퀴 돌았지만 단지 내 상가도 모두 문을 닫아버린 늦은 시간, 오가는 사람도 없는 길에는 가로등만이 무심히 밝혔을뿐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112로 신고를 했다.
"여보세요? 여기 xx아파트 xx동xx호 인데요. 저희 엄마가 치매신데 집에 안계세요. 어떡해요, 어떡해"라며 울음으로 말을 잇지 못하자 경찰은 '곧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엄마를 찾아야 할지 알지 막막했지만 난 주변 옆단지를 마냥 이곳 저곳 뛰어다녔다.

경비 아저씨와 옆집 아저씨도 잠바를 입고 뛰어나와 엄마를 찾아주었다. 운동삼아 걸어서 엄마를 병원까지 모시고 간 적이 있었던 아파트 뒷길도 가 보았다. 12시가 넘은 아파트 단지는 정말 적막했다.

"엄마 ~ 엄마 ~ 어딨어. 엄마~"
나의 울음과 고함소리는 아파트 단지 가득 울려퍼졌지만 엄마의 흔적은 없었다.

'지금 엄마는 얼마나 두려울까' '얼마나 겁이 나 있을까 '겉옷도 입지 않고 입던 옷으로 나가셨을텐데 얼마나 추울까' 난 미칠것 같았다. 두려움과 공포, 추위에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엄마가 어딘가를 헤메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언니가 돌아 간 후 엄마와 6시쯤 통화를 했으니까 그 이후에 집을 나갔다면 지금까지 7시간 넘게 혼자 헤매고 있었을 터였다. 혹시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 건물 구석에 쪼그리고 어두운 밤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상상으로 난 거의 실신 상태가 되었다.

파출소에는 연락해 보았냐는 언니의 말이 생각나 확인해 보려던 차에 핸드폰벨이 울렸다.

"혹시 할머니 찾는다고 신고했어요?"
"네. 네네."
"지금 저희 엄마 어디 계세요?"
순간 엄마의 안전이 확인된 듯 싶었다.

"할머니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세요?"
"혹시 키가 좀 작으시고 분홍색 셔츠에 머리는 붉은색으로 염색하셨나요?"
울며불며하는 내 말이 잘 들리지 않았던지 경찰은 내게 하나하나 확인을 하였다.

"네, 맞아요. 맞아요. 저희 어머니예요."
"지금 울 엄마 어디 계세요?"
"네 신갈파출소인데요. 할머니가 어디 사는지도 잘 모르고 옛날 서울 전화번호만 자꾸 말씀하시고 할머니 연락처 적은 팔찌든 목걸이든 하나 해서 걸어드리지,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여적 여기 계셨잖아요."

"교회갔다가 딸네집 간다고 자꾸 그런 말씀만 하시고 자식 이름도 모르시지 대화가 되어야 무슨 말씀을 여쭙지요, 지금 곧 모셔다 드릴게요."

"네 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경찰의 나무람 섞인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난 고맙다는 말만 연발하며 전화를 끊은 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와 직접 통화를 해서 안심시킬 걸' '내가 차라리 파출소로 갈까?몇 시에 파출소로 오셨나 물어볼 걸' 이런 저런 생각이 와글와글 내 머리를 어지럽게 하면서도 파출소 한구석에 오똑하니 앉아 두려움으로 몇 시간씩이나 기다렸을 겁먹은 엄마의 황량한 눈빛이 생각나 가여움으로 눈물만 흘렸다.

'이제 찾았으니 진정하라'는 앞집 부부와 경비 아저씨의 위로에도 나의 울음은 멈춰지질 않았다. 입을 막고 꺽꺽대고 울고 있던 차에 언니가 도착했다. '인주를 가지고 나오라'는 전화를 받은 얼마 후 엄마를 태운 경찰차도 나타났다.

경찰차 뒷자석에 반듯하게 앉아 있던 엄마는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으리라는 염려와는 달리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엄마의 손에는 버리려 현관에 내놓았던 빈쥬스통, 빈단판죽용기 등 재활용 쓰레기가 담긴 종이 쇼핑백이 들려져 있었다.

"엄마 ~ 엉 엉 엉~ 왜 나갔어?"
"집에 있지 왜 나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울며불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살아 왔잖아."
엄마는 별일 아니란 듯 대답했다.

"엄마, 겁 났지. 집 잃어버릴까봐 무서웠지?"
"무섭긴 뭐가 무서워? 경찰들이 다 알아서 찾아주는데."

엄마를 안았다. 살찐 엄마의 몸이 내 품 속으로 쏙 들어올 정도로 엄마는 너무나 작아져 있었다. 손이 찼다.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맨발이었다.

엄마를 모시고 온 경찰은 어느 택시기사가 엄마를 파출소에 인계했다는 얘기와 함께 좀전 전화로 설명했던 그간의 과정을 반복하여 얘기하며 꼭 인적사항 목걸이를 해드리라는 당부와 택시기사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도장을 받은 후 돌아갔다.

엄마에게 청심환을 잡숫게 하고 언니와 난 이것저것 물었다. 담담한 처음의 대답과는 달리 집으로 들어온 엄마의 말에는 그 몇 시간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엄마 왜 나갔어."
"응, 교회 갔다가(작화현상) 옛날 서울같으면 내가 눈 감고도 찾아오는데 여긴 길도 잘 모르잖아. 경찰들이 둥글넙적하게 생긴 사람이 아마 오야봉인가봐, 그 사람이 나보고 전화번호를 대라고 하는데 난 새로난 전화번호도 모르고, 아휴~."

"경찰들이 댓명 되더라, 그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자꾸 물어보는데 알아야 대답을 하지. 내가 이제 바보가 되었나봐. 집도 모르고."
"내가 안 나가려고 했는데 잠깐 정신이 헷가닥했나봐, 나는 안 나가려구 하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나가게 돼."

실제 있었던 일과 엄마 상상 속의 얘기가 혼재되어 엄마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엄마 안 무서웠어?"
"무서웠지. 왜 안무서워? 집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엄마는 이제야 속내를 털어놓았다.

"엄마 언니랑 내 이름 몰라?"
"내가 바보야? 자식 이름도 모르게"하며 눈을 흘긴다.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똑똑하게 잘 아는 초등학교 일이학년 되는 아이들도 집을 잃었을 때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전화번호나 집주소를 잊는다고 한다. 충격이 일시적인 망각상태에 빠지게 되는 현상인데 아마 엄마도 그랬던 모양이다. 언니와 내 손을 잡고 한 삼십분 이상 같은 얘기를 반복하던 엄마는 잠이 들었다.

그 날 이후 며칠 동안 엄마는 식사도 걸러가며 잠만 잤다. 오줌도 쌌다. 걷는 것을 잊은 사람마냥 엄마는 발걸음조차 떼지를 못했다. 두 사람이 겨우 부축을 해야 화장실로 갈 수가 있었다. 몸의 중심도 잡지 못해 소파에 앉아있을 때도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에도 몸을 부축하고 있어야 했다.

몸이 몹시 아프다는 호소와 함께 새벽에도 몇 번씩 놀라며 헛소리를 지르며 손을 허공속에 헤젓고는 했다. 끊임없이 두통을 호소하며 헷갈림은 더욱 심하여 식탁 의자 밑을 보며 "연지야- 연지야"하며 있지도 않은 조카를 부르기도 했다.

난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저리 되었을까? 인적사항이 담긴 팔찌를 해드렸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파출소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 것을,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았을때 이웃집에 연락이라도 했었으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것을' 이런저런 자책감으로 맘 아파해야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집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혼자서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해 화장실도 손잡고 함께 가야 하는 나의 엄마는 이제 이 닦는 것도 봐드려야 하고 밥먹는 것도 옆에서 거들어 드려야 하는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한없이 작아진 엄마의 손을 꼭 잡는다.

얼마 후 어쩌면 엄마는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핏덩이었던 나를 지금껏 애면글면 사랑으로 키워주고 보살펴주신 것처럼 엄마가 똥오줌싸는 갓난 아이로 돌아가는 날, 나 또한 그만큼의 사랑을 엄마에게 드릴 수 있을까?

새해이다.
올해는 그 동안 미루어 왔던 엄마의 고향 김천을 꼭 모시고 가야겠다. 엄마가 더 정신을 놓으신 후에 그 곳에 간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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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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