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들은 외롭지만 강해 보였다

연습을 위한 여행

등록 2003.01.06 09:44수정 2003.01.14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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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수험생인 아들을 따라 이박삼일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들이 3일 동안 면접과 실기시험을 치르는데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보호자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내였고, 저는 다 큰 아이를 혼자 보내면 되었지 무슨 보호자가 필요하냐고 완강하게 반대의사를 내비치다가 이번 기회에 여행이나 해보자고 은근슬쩍 생각을 바꾸어 아들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아들도 제가 보호자로 동행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겠다고 해놓고는 출발 전날 저녁 부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더니 혼자 가면 안되겠느냐고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식탁 밑으로 무언가 발을 툭툭 건드리는 것이 있어 보니 아내였습니다. 아들의 말에 절대 넘어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표시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트처럼 저를 사이에 두고 아내와 아들 사이에 몇 번 공이 오고 갔습니다. 아내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치르는데 그것을 혼자 하려고 하느냐고 말했고, 아들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혼자서 해야되지 않겠느냐고 응수를 했습니다.

가만 눈치를 보니 독립심의 발로에서라기보다는 아들녀석도 이번 기회에 혼자만의 여행을 꿈 꾸고 있는 듯했습니다. 공이 서너 차례 오고 갈 무렵 제가 끼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한 치의 시행착오를 허락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니까 엄마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너 혼자만의 여행은 시험이 끝나고 나면 보내주도록 할게."

아들아이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아내의 화색이 환하게 돌아오면서 이박 삼일의 짧은 여행은 결정이 되었습니다. 아들녀석은 제 유인책에 넘어간 줄도 모르고 내일 모레 사이 중부와 북부 지역에 많은 눈이 오기로 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일기예보까지 전해주었습니다. 따라가는 저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당사자인 아들까지 시험보다는 여행에 마음을 두고 있는 듯하여 잠깐 멍하니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a 겨울나무와 겨울 여자

겨울나무와 겨울 여자 ⓒ 안준철

아들의 전공분야는 작곡입니다. 그런데 대학 전공을 음악으로 정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직장 잡기도 힘들고 장래가 불투명한 음악을 전공하려고 하느냐는 것이 아내의 말이었습니다.

저도 아들이 나름대로 음악 공부를 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전공까지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터라 아내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혹시라도 순간의 미혹에 빠져 음악을 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아이는 저녁 식사를 하다말고 우리 내외에게 대화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도 아내는 식탁 밑으로 제 발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불안했던지 음악 이야기라면 꺼내지도 말라고 아예 못을 박아두었습니다.

아내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던 것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되라'는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여차하면 그것을 다시 들이댈 준비도 되어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 아내의 심중을 꿰뚫기라도 한 듯 아들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되라고 늘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좋은데 그렇게 하다보면 자기 자신의 주장을 펴지는 못하게 되잖아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저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제가 어리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하지만 저도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그때는 제가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을 내리고 그래야 하는데 아빠 말씀대로 그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이잖아요."

여기까지 말하고는 숨이 막히는지 목이 마르는지 잠깐 침을 삼키고 앉아 있는 아들아이를 바라보는 아내의 표정은 참 복잡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아내와는 반대로 생각이 갈수록 단순 명료해지고 있었습니다.

아들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말을 어렵사리 꺼내어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드러낼 줄 아는 아들이 대견스럽기만 했습니다. 아내가 무어라고 대꾸를 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식탁 밑으로 아내의 발을 제 쪽에서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마지막 말을 경청했습니다.

"엄마 아빠, 죄송하지만 제 전공을 제가 결정하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엄마 아빠가 무엇을 걱정하시는 줄 저도 알아요. 그 생각이 기우였다는 것을 저는 꼭 보여드리고 싶어요. 정말 열심히 할게요."

아들이 말을 다했다는 듯이 천장을 한 번 바라본 뒤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자 그 무거운 분위기에 질렸는지 아내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어 들이키고 나더니 뭐라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복잡한 표정만을 계속 짓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여 제가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우리가 아들 하나는 제대로 키운 것 같지 않아?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도록 하게 합시다. 그래야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할 수 있을 거야."

아내는 그날 이런 저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마음에 결심이 섰는지 아들을 불러 몇 가지 다짐을 받고는 세상을 얻은 듯 좋아서 돌아가는 아들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는 것이 아내도 내심 아들녀석이 대견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에서는 어두운 그림자라곤 자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신뢰를 얻은 아들은 아내와의 약속을 잘 지켜 음악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a 눈을 머리에 인 여인

눈을 머리에 인 여인 ⓒ 안준철

여행 이틀째 되는 날 오후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근래 보기 드문 큰 눈이었습니다. 눈은 밤을 새워 꼬박 내려 다음 날 아침 넓은 대학 캠퍼스가 온통 흰눈으로 덮였습니다. 면접과 실기시험을 치르느라 여념이 없을 아들을 생각해서 저는 서투른 솜씨지만 사진기에 아름다운 설경을 담기에 바빴습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저는 저대로 시험을 치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연습과 시행착오를 통해서 좋은 그림을 얻으려고 말입니다.

a 홀로 선 겨울나무

홀로 선 겨울나무 ⓒ 안준철

교정 한 가운데 서 있는 겨울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들아이가 시험을 다 끝내고 막 모습을 보일 무렵이었습니다. 흰눈이 내려 덮인 눈부신 은세계의 황홀함 속에서도 그 겨울나무만은 처연할 정도로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얀 눈밭으로 걸어오는 아들의 모습 또한 겨울나무처럼 외로워 보였습니다. 외로워 보였지만 강해 보였습니다. 오래 전에 쓴 한 편의 시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너를 보면 나는 뉘우치고 싶어진다
헐벗을 것밖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내 곁에, 나도 가만 서 있고 싶어진다
괴로워하는 것밖에는 아무 위안이 없는
네 곁에서, 나도 몸 속까지
추위를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그리고 새잎 하나 달고 싶어진다

- 졸시, '겨울나무'


저는 이제 곧 대학생이 될 아들에게 무엇보다도 고독의 정신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고독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황홀한 초록의 새봄을 맞곤하는 겨울나무처럼 말입니다. 다만, 그 고독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아들에게 사랑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a 겨울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생명의 붉은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생명의 붉은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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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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