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의는 의원으로서 황급히 그들이 데리고 온 소년을 살폈다. 병장기에 의하여 당한 듯 복부가 갈라진 소년은 소생할 가망이 전혀 없었다.
어른 주먹 셋은 족히 들어갈 만큼 크게 벌어진 복부 사이로 베어진 오장육부가 보였다. 또한 워낙 많은 실혈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소년을 살핀 북의는 고개를 저으며 소생 가능성이 없다 하였다. 하지만 복면인들은 막무가내였다. 천하제일의로 불리니 무조건 살려내라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의라 할지라도 고칠 수 있는 병이 있으며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면서 완곡하게 거절하였으나 복면인들은 거의 윽박지르다시피 하면서 어서 고쳐내라 채근하였다.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성인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는 법이다. 북의는 느닷없이 나타나 예의범절에 크게 어긋난 행동을 하는 복면인들이 괘씸하였다. 하여 다소 냉정하게 자신의 능력 밖이니 어서 데려가라 하고는 행랑아범의 탕약을 살폈다.
이것을 본 흑의인 가운데 하나가 탕약을 달이던 화로(火爐)를 걷어찼다. 다 달여졌던 탕약은 엎질러졌고, 화로가 자빠지면서 쏟아져 나온 시뻘겋게 달은 숯 때문에 행랑아범이 누워 있는 병상(病床) 근처에 쌓아 놓았던 약재에 불이 붙었다.
놀란 북의가 불을 끄려 할 때 복면인은 거칠게 그의 멱살을 잡아채면서 먼저 소년을 살려내라 하였다. 이에 북의는 정말 살릴 수 없다면서 자신을 놓아달라고 하였다. 불길이 점점 행랑아범 쪽으로 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복면인은 멱살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실랑이를 벌리던 중 복면인은 그따위 천한 것은 죽어도 상관없으니 소년을 살리라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는 사이 뜨거운 불길은 행랑아범을 삼키고 있었다. 산 채로 타 죽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본 북의는 지금껏 억눌렀던 분노를 토출하였다.
고칠 능력이 있어도 절대 소년을 치료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 순간 소년의 목은 힘없이 꺾였다. 이것을 본 흑의인들의 눈에서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안광이 솟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천의장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밖에 있던 흑의인들에 의하여 천의장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는 소리였다. 그 안에는 북의의 자식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손녀, 의생들과 환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하인들로부터 칭송을 듣던 천의장은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모든 전각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놓여 있었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흑의인들과 북의 뿐이었다.
잠시 후 약재를 썰던 작두에 오른 손목이 절단된 북의가 비명을 지를 때 흑의인들은 소년의 시신을 들쳐업고는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북의는 모든 것이 꿈인 듯하였다.
천의장에는 자신의 식솔들 외에도 의생 오십여 명이 있었고, 시중을 들어주는 의녀들과 하인들의 수효만 해도 백여 명 이상이 있었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환자도 백여 명이나 있었다.
그런 그들 모두가 처참한 시신이 되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노릿한 냄새를 풍기는 모습이 어찌 꿈처럼 느껴지지 않겠는가! 게다가 의원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오른쪽 손목마저 절단되어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몇 년 전 북의가 겪은 참화(慘禍)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남소에서는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사시사철 얼음으로 뒤덮인 북해(北海)의 동토(凍土)에서였다. 마치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처럼 삼 년 동안이나 유랑하던 그가 멈춘 곳에는 만년빙극설련이 있었다.
이 년을 기다린 끝에 설련실을 얻은 그가 다음에 나타난 곳은 대흥안령산맥 부근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인지라 영험한 약초들이 많이 자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지금껏 세상에 만들어진 적이 없는 하나의 영단을 제조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북명신단이다.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신단보다도 월등한 효험을 지는 그것은 사내가 복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구나 알 듯 사내는 양(陽)이고 계집은 음(陰)이다. 그렇기에 사내의 몸으로 천지간에 가장 강한 음기(陰氣)를 지닌 그것을 복용하면 즉각 주화입마(走火入魔)보다도 더 처절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게되기 때문이다.
북의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그토록 고생하며 북명신단을 만들려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일순간에 와해시킨 인면수심(人面獸心)을 지닌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자신이 흑의복면인들을 상대하려면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강구한 것이 바로 북명신단이었다.
극과 극은 상통한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 극음(極陰)의 성격을 지닌 만년빙극설련실의 음기를 일순간에 양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영험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북의는 이것을 복용하고 복수하려는 것이었다.
이곳에 처음 자리 잡았을 때 북의는 다 떨어진 의복을 걸친 여아(女兒) 하나가 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피붙이가 비명횡사하여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린 그는 그 여아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가 바로 산맥 너머로 시집을 간 손녀였다.
그가 의서를 편찬하는 이유는 적당한 후학에게 의술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다. 북명신단을 복용하고 나섰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평생의 심득(心得)이 사라지는 것이 아깝다 생각한 것이다.
* * *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그럼 여기가 산해관(山海關)!"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낸 이회옥은 미소를 지으면서 비룡의 갈기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고생스러웠던 지금까지의 길이 이제는 끝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문이 하나 있었다.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산해관이었다.
태극목장에서 참사가 있은지 두 달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맹호의 추격을 따돌린 후 이회옥은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아직 시신을 뜯어먹고 있을 늑대 떼들 때문이 아니었다.
비룡이 호랑이를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동안 어떻게 건너기는 하였는데 막상 건너고 나니 다시 건너 뛸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건너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절벽 끝에 당도하면 멈추곤 하였던 것이다. 마땅히 건널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할 수 없이 비룡을 몰아 산 아래로 내려갔다. 맹수들이 있는 산에서 밤을 샐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태극목장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십 년 이상을 자란 그였지만 그 길은 처음이었다. 수풀을 뚫고 이틀을 걸어 산 아래로 내려온 그는 이번엔 비적들을 발견하고 숨죽이고 있어야 하였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그들에게 발각되면 비룡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죽거나 그들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쯤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회옥은 울창한 수풀에 가려진 동혈(洞穴) 속에 있었다.
지난 밤 혹시 맹수들이 출현할까 싶어 그 안으로 들어간 후 돌무더기로 입구를 적당히 막아 두었던 것이다. 하여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떠드는 비적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비적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이회옥은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려왔다. 지난 며칠 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구수한 음식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비룡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회옥은 자신이 차라리 말이었으면 싶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속이 쓰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반나절이 넘도록 먹고 마시던 비적들이 떠난 자리에는 다행히 음식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것은 먹음직스런 사슴의 뒷다리 구이였다. 이회옥은 주린 배를 채우고도 한참을 머물렀다가 조심스럽게 관도를 따라 이동하였다.
이후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던 그는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가 자그마한 시진에 당도하게 되었고, 자신이 대흥안령산맥을 완전히 내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산으로 올라갈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하였다.
가본들 아무것도 없을 것이 뻔하며, 늑대나 맹호같은 맹수들이 득실거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여 이회옥은 아직 덜 여물어 시금털털하거나 시큼한 과실들을 따먹으면서 관도를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갔다.
그동안 할아범에게서 배운 기술로 활투(活套)를 여러 번 설치하였으나 실패하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간간이 토끼가 걸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굶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가 이곳 산해관으로 온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이곳을 통해 가면 천자가 머무는 황도로 갈 수 있다 하였기 때문이다. 태어난 이후 한 번도 하산해 본 적이 없던 그는 기회가 닿으면 말로만 듣던 만리장성과 황궁을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신세가 편했을 때 이야기이다. 산해관을 찾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호구지책(糊口之策)을 마련하고 재기의 발판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곳은 많은 문물이 집산하는 곳이다. 그리고 조선이나 만주의 상인들이 황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지나왔던 여느 시진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화려한 전각들이 즐비하였으며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러한 모두 것들은 소년 이회옥에게는 처음이었다. 이 층 이상으로 지어진 객잔은 물론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진귀한 물건을 내놓고 파는 상점들도 처음이었다. 기원의 문 앞에서 소리치며 손님을 끄는 호객꾼들의 모습도 처음이었다.
"우와!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지었지? 저긴 어떻게 올라갔을까? 잘못해서 떨어지면 무지하게 아플 텐데…"
이회옥은 눈앞에 보이는 오 층짜리 객잔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태어난 이래 가장 신기한 건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야, 꼬마야! 비켜! 빨리 안 비켜?"
"앗…!"
누군가의 음성에 고개를 돌렸던 이회옥은 황급히 몇 발짝 물러섰다. 등뒤에는 가마를 든 장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치듯 지나는 가마의 흔들리는 주렴 사이로 두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이제 열두 살 가량 된 앙증맞은 소녀였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모친인 듯 싶었다.
막 가마가 지나가는 순간 소녀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이회옥의 발 앞으로 마침 손에 들고 있던 은자를 던졌다. 이 순간 이회옥은 은근히 화가 났다. 아무리 때가 잔뜩 끼어 시커멓고 꾀죄죄한 의복을 걸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을 거지 취급하였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구걸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선친이 된 부친으로부터 모름지기 사내라면 남의 동정을 사서는 안 된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친은 "일은 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도 없는 자"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쓰곤 하였다. 다시 말해 부지런한 자는 굶어죽을 염려가 없다는 것이 부친의 지론이었다. 하긴 그렇기에 당당히 태극목장 제일목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구걸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설익은 과실을 먹고 설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구걸만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회옥의 결심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황급히 발 앞에 떨어진 은자를 주워들었다. 그것을 돌려주고 거지가 아니라고 한 마디 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은자를 돌려줄 수 없었다. 눈앞에 있던 가마가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마까지 다가가려면 많은 인파를 헤쳐야 하는데 비룡을 데리고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흥! 나를 감히 거지 취급을 하다니…'
자존심이 상한 이회옥은 언제고 다시 만나면 은자를 돌려주리라 마음먹고 인파를 헤쳤다. 이곳 산해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무천장(武天莊)으로 가기 위함이다.
덧붙이는 글 | [안내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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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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