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위, '앙마'와 관련하여
사실을 밝혀 바른 이해를 구합니다

등록 2003.01.06 16:35수정 2003.01.0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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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애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마이뉴스>의 미군장갑차 여중생사건 및 광화문 촛불시위 취재를 담당하고 있는 김지은 기자입니다.

최근 촛불시위 및 촛불시위 제안자인 '앙마'(본명 김기보)와 관련한 기사를 두고 사실이 잘못 알려지고 있는 데다가 이로 인해 예상치 못했던 오해까지 낳고 있어 담당기자로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이 문제를 사실대로 밝혀 독자 여러분의 바른 이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1. "'앙마'가 자사 '기자'라는 사실을 알았는가"라는 지적에 대해

최근 일부 독자의견 중 "오마이뉴스가 자사 기자 앙마를 의도적으로 띄우고 '올해의 인물'상까지 주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는 자칫 독자 여러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기에 설명 드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해 11월 28일 '촛불시위'에 관해 최아무개씨 등 여러 독자들로부터 이메일 및 전화를 통한 '제보'를 받았습니다. 누군가 인터넷 게시판에 '주말 촛불시위를 하자'는 글을 올렸고 이것이 네티즌들을 통해 퍼지고 있으니 알아봐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상근 기자나 뉴스 게릴라 중에서도 이미 이 글을 본 사람이 다수였습니다. 그래서 주시하고 있던 차 독자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에 대해 의미 있게 짚어보자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을 내린 후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 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이하 범대위)' 상황실 측에도 문의를 했습니다. 당시 범대위 상황실 측은 "범대위 쪽으로도 문의 전화가 오고 있다"며 "당일 오후 마로니에 공원 집회 후 광화문 촛불시위에 합류할 계획"이라고 전해왔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이를 보도하기로 결정, '2002 민중대회'와 '살인미군 무죄규탄·전쟁반대·WTO 교육개방 저지 청년학생 총력투쟁대회' 행사와 함께 '광화문 촛불시위' 네티즌 제안에 대한 예고 기사를 11월 30일 오전 게재했습니다.


오후 6시, 실제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는 이미 수백 명의 촛불시민이 나와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시민들이 노래를 부르고 화단에 '자유발언대'가 마련됐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누군가 화단에 올라 "내가 바로 그 글을 올린 네티즌"이라며 "이렇게 많은 시민이 나와주실 줄 몰랐다.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하고 있던 본 기자는 바로 그 사람에게 다가갔고 간단히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앙마"라고 밝혔습니다. 실명을 다시 물었으나 그는 "나는 네티즌일 뿐이니 그냥 아이디만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짤막한 인터뷰 후 "<오마이뉴스> 기자"라고 소개하니 그는 반가워하며 "나는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라면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오래 전에 가입했는데 기사는 거의 못 썼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앙마를 취재한 기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마이뉴스>는 앙마를 처음 인터뷰하게 됐습니다. 아마 현장에 다른 언론사 기자 누가 있더라도 그를 인터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앙마를 인터뷰한 언론사는 <오마이뉴스> 뿐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첫 촛불시위를 주목하고 당시 '광화문 아크로폴리스'를 현장 가까이에서 가장 생생히 보도한 언론사가 <오마이뉴스>였기에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인터뷰가 나간 다음날부터 <오마이뉴스> 편집국으로 다른 신문·방송사 및 독립 프로덕션 등에서의 문의가 빗발쳤습니다. 첫 번째 문의는 모 방송사의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문의가 온 후 <오마이뉴스>는 앙마에게 연락, 연락처 공개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앙마는 "고민이 된다. 얼굴이 공개되는 것은 원치 않지만 일주일 뒤 촛불시위를 더 많이 알리려면 내 신상이 공개되는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며 연락처 공개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이어 더욱 많은 언론사에서 연락이 왔고 이후 다시 앙마에게 연락, "앞으로 걸려오는 모든 문의 전화에 연락처를 공개해도 되겠는가. 연락이 많이 와 일일이 의사를 타진할 수 없겠다"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앙마의 연락처가 다른 언론사에 알려져 매스컴의 조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앙마가 '김기보 기자'였다는 사실을 몰랐는가"라는 지적에 대해

<오마이뉴스>는 사이트의 소개란에도 잘 설명해 놓았듯 '직업기자(상근 기자)'와 '생활인기자(뉴스 게릴라)'의 조화를 표방한 매체입니다. '기자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참여 저널리즘을 구현하고자 만들어진 매체입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를 모토로 만들어지는 <오마이뉴스>는 2002년 12월 29일 현재 총 2만2120명의 뉴스게릴라(시민기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중에는 주부, 학생, 학자, 다른 매체 기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는 '전문가'인 이들이 생활 속, 혹은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된 사안을 취재, 보도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날 <오마이뉴스>의 근간이자, 큰 힘입니다.

다시 말해 <오마이뉴스>의 뉴스게릴라의 신상과 얼굴을 편집부나 운영국에서 다 파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앙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뒤늦은 확인 결과, 앙마가 <오마이뉴스>에 자신의 이름으로 촛불시위 제안과 관련한 기사를 올린 적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당시 <오마이뉴스> 편집진은 '앙마=김기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앙마는 첫 촛불시위 후 약 1주 동안은 실명 공개를 원치 않았습니다. 물론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도 그가 두 번째 촛불시위 자유발언대에서 이름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실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편집부는 당시 앙마가 <오마이뉴스>로 '촛불시위' 관련 기사가 송고한 사실과 이를 올린 김기보씨가 앙마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편집부는 당시 김기보씨 기사가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고 있는 글을 소개한 기사여서 정식기사로 채택하기는 했으나, 기사가 대부분 '인용 문구'로 되어 있어 주요한 기사로 배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앙마는 자신이 제안한 촛불시위를 자신이 직접 보도한 것에 대해 "단지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다"라며 "목적이 어찌되었든 수단이 잘못됐음을 인정한다. 죄송하다"라고 말했습니다.

3. "일부러 앙마를 부각시키고 '올해의 인물' 상까지 주었다"는 의혹 제기에 대해.

그러므로 "<오마이뉴스>가 사전 모의하에 앙마의 기사를 통해 촛불시위를 널리 알렸고 이를 이용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는 글은 전혀 근거 없는 내용입니다. 또 <오마이뉴스>는 앙마 개인을 영웅화시키려는 의도도 없었습니다. 왜 '앙마'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는지에 대해서 당시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올해의 인물- 앙마, 그리고 대한민국 네티즌]

<오마이뉴스>는 광화문 촛불시위를 처음 제안한 네티즌 '앙마'를 '2002 올해의 인물'로 선정합니다. 독자여러분의 추천을 받은 후 최종선정과정에서 편집국 내의 별 이견은 없었습니다. 다만 조건은 하나 있었습니다. '앙마'를 위시한 수십 만명의 '대한민국 네티즌'이 '진짜 수상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네티즌'들은 월드컵 응원전의 신화를 만들어냈고, 보수언론의 왜곡편파 보도를 견제했으며, 또 2002대선의 정치혁명을 통해 세상의 주류를 바꿔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내기 위해 연일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핵위기와 관련해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2002년의 마지막 날 밤에도 반전평화를 외치려 광화문에 모입니다.

역사는 2002년 한 해를 "한국민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보인 해"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 자랑스런 해를 만들어낸 '역사 전환'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네티즌입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를 모토로 시민참여저널리즘을 정착시킨 <오마이뉴스>는 2002년 한해동안 자랑스런 '대한민국 네티즌' 여러분과 늘 함께 했다는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여기, 여러분을 대표한 상징적 인물 '앙마'의 한해를 소개합니다.


일부 독자의견은 이러한 배경과 독특한 <오마이뉴스>의 기자 구성 시스템을 알지 못한 채 기성 언론사의 구조에 빗대 설명함으로써 사실을 왜곡, 여론을 호도할 소지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4. "지난 4일 촛불시위에서 차별적 보도를 했다"는 지적에 대해.

<오마이뉴스>는 생활인기자(뉴스게릴라) 2만 여명과 직업기자(상근기자) 30여명으로 이뤄진 매체입니다. 특별히 지속적으로 보도해야할 사안에 대해서는 성격상 상근기자가 투입되게 됩니다.

지난 해 6월 발생한 미군장갑차(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의 경우 이에 해당합니다. 지난 해 6월 이후 <오마이뉴스>는 이를 <[특별기획] 미군 범죄 없는 세상을 꿈꾸며>라는 특별 섹션으로 만들어 집중 보도했습니다.

현재 이 사안에는 사회부 기자 2명이 배치돼 있습니다. 기성 언론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오마이뉴스>의 상근 기자 인력을 고려할 때 파격적인 조치입니다. 이런 조치의 배경에는 이 사건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월4일 촛불시위는 이 2명의 기자 중 1명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취재를 나가지 못하고 대신 다른 기자 1명이 투입, 총 2명의 취재기자와 1명의 사진기자가 취재를 담당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해 여러 독자가 "세종문화회관 쪽 집회와 교보문고 쪽 집회 사진의 질이 왜 다른가" "왜 두 집회를 나눠 보도했는가. 시위의 분리를 의도한 편집이 아닌가"라는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일단 사진문제에 대해 설명을 드립니다. 현재 <오마이뉴스>는 인터넷 판과 주간 종이신문을 동시에 펴내고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발간되는 <주간 오마이뉴스>는 매주 주말이 편집 및 기사 마감입니다. 때문에 사진기자들은 주간지 사진 마감 작업으로 편집국을 떠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 동안 매주 양질의 주말 촛불시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건 사진기자의 욕심과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당일에도 1명의 사진기자가 두 현장을 담당해야 했고 비교적 편집국과 가까운 세종문화회관을 먼저 취재하게 됐습니다.

이후 교보문고 쪽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이미 시위가 끝난 상태였고 결국 현장 취재를 한 취재기자가 찍은 사진을 배치하게 됐습니다. 전문 사진기자가 사진취재용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현장 취재기자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질이 다른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 배경엔 이런 사정이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왜 당일 두 현장을 다 보도했느냐는 지적에 대해서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범대위 측을 옹호하는 매체도, "앙마측"을 옹호하는 매체도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현장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여러분의 판단을 돕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따라서 당일 두 현장 모습을 보도하는 건 그간의 <오마이뉴스>의 편집방침과 다르지 않으며 언론으로서 당연한 보도자세입니다.

5. 끝으로

다른 어느 언론사보다도 미군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관련 사안을 심도있고 지속적으로 보도해온 <오마이뉴스>의 그간의 보도활동을 격하시키는 내용의 글에 대해 취재기자로서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이 글로써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떠돌고 있는 여러가지 오해가 전부 풀리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오해는 시일이 지나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저희는 이번 기회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의 지적에 귀기울이는 동시에 앞으로도 더욱 책임있는 보도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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