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겨울밤에 읽은 한 편의 소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읽다

등록 2003.01.08 23:55수정 2003.01.0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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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먼지가 쌓인 책을 한 권 꺼낸다. '객지'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황석영의 소설집이다. 1989년 13쇄를 거듭하던 와중에 식구들 중의 누군가가 산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방금 전까지는 그의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다.

책표지 바로 뒤의 작가 사진을 본다. 부셔진 가옥의 잔해 앞에 심각한 표정의 황석영이 있다. 일부러 연출한 사진이라기보다는, 작품을 구상하던 중에 누군가 살짝 찍은 것인 듯 자연스럽다. 그 아래에는 작가의 간단한 이력이 있다.

1962년 '입석부근'이 사상계지에 입선, 이라고 쓰여 있다. 1943년생이니까 19살에 문단에 데뷔한 셈이다. 그는 경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중단편 중 어떤 것으로 이 야심한 밤을 보낼까 고심해 본다.

객지, 한씨연대기, 아우를 위하여, 낙타누깔, 이웃 사람, 잡초, 돼지꿈, 삼포 가는 길. 시선이 삼포 가는 길에서 멎는다. 언젠가 읽었던 단편이다. 언뜻 생각하건대 겨울밤과 아주 잘 어울리는 소설이라는 생각, 아니 확신이 든다. 그는 서둘러 258페이지의 삼포 가는 길과 만난다.

길 위에서 두 사내가 조우한다.

그들은 공사판에서 함께 일해 의례적인 인사 정도는 나누던 사이이다. 이른 새벽, 일이 떨어져 또 다시 일거리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사내들 사이에서 허한 대화가 오간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듯한 사내는 정씨, 어린 축은 영달이다. 정씨가 영달에게 묻는다.

"얼마나 있었소?"

공사판에서 얼마나 있었냐는 질문이다. 영달이 대답한다.

"넉 달 있었소. 그런데 노형은 어디루 가쇼?"
"삼포에 갈까 하오."

영달은 고향땅인 삼포에 갈 예정이라는 이 사내에게 호감이 간다. 그래서 그와의 동행을 자청한다. 폭설이 내렸고 몹시 춥다. 들판을 지나고 꽁꽁 언 강을 건너며 헉헉거리던 영달이 버스를 탈 걸 그랬다고 투덜거린다. 정씨가 말한다.

"자주 끊겨서 언제 올지두 모르오. 그보다두 현금을 아껴야지. 굶어두 돈 있으면 든든하니까."

빈곤한 두 사내는 군대 주둔지 근처의 한 읍내로 들어간다. 다과점, 극장, 다방, 당구장, 만물상점 등이 시야를 스쳐가고 어느 읍내에나 있을 법한 서울식당이라는 주점으로 들어간다. 식당에서는 한 뚱뚱한 여자가 큰 솥에 우거지국을 끓이고 있는 가운데 그 옆으로는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와 동네 청년 둘이 떠들어대고 있다.

"나는 전연 눈치를 못챘다구. 옷을 한가지씩 빼어다 따루 보따리를 싸놨던 모양이라."

두 사내는 국밥을 주문하고는 간밤에 도망간 술집여자 '백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국밥이 나오자 허겁지겁 배를 채우던 두 사내는 길 가는 중에 혹시라도 백화를 만나 잡아다 주면 만원을 내겠다는 뚱뚱한 아낙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그러마하고 가게 문을 나선다. 아낙이 그 뒤에다 대고 한마디 더 한다.

"머리가 길구 외눈 쌍까풀이에요. 잊지 마슈."

사내들은 또 다시 눈 덮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산다는 건 이렇게 모진 길로만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것인지. 그들의 마음은 어두워질 만도 하지만, 오히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며 정씨가 이렇게 한마디 한다.

"야 그놈의 눈송이 탐스럽기두 하다. 풍년 들겠어."
"눈 오는 모양을 보니, 근심걱정이 싹 없어지는데..."

병달이도 정씨의 말에 동조한다. 마을 하나를 지나 두번째 마을을 지날 때에 그들은 송림 사이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한다. 여자가 깜짝 놀라 속곳을 올리고는 투덜거린다.

"개새끼들 뭘 보구 지랄야."

외눈 쌍까풀, 간밤에 야반도주 했다던 백화다. 정씨와 영달이는 아까 뚱뚱한 아낙이 했던 말에도 불구하고, 긴 화류계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백화를 길동무로 맞는다. 세 사람의 여정은 점점 더뎌진다. 느린 걸음으로 시간을 지체하던 백화는 설상가상 발까지 삐어 영달이의 등에 업힌다.

그들은 기차를 탈 수 있는 감천 읍내에 도착해 장터 모퉁이에서 팥시루떡을 사먹는다. 백화가 자기 몫에서 절반을 떼어 영달이에게 내민다.

"더 드세요. 날 업구 왔으니 기운이 배나 들었을 텐데."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기차역에서 백화는 사내들에게 자기 고향에 함께 가자고 하지만 사내들의 마음은 이미 삼포로 향해 있다. 영달이는 무일푼이라는 백화에게 기차표와 삼립빵 두개, 찐 달걀을 사서 안겨주고는 작별을 고한다.

자, 이제 삼포에 갈 일만 남았다. 그곳은 고단한 생을 살아온 정씨와 그에게 약간은 의지하려 하는 영달에게 어머니의 따뜻한 품, 바로 낙원의 의미이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그들에게 한 노인이 말을 건다.

"어디 일들 가슈?"
"아뇨. 고향에 갑니다."

그들은 삼포를 이야기한다. 노인은 자기 아들이 그곳 공사판에서 일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정씨가 놀라서 말한다.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릴 데나 됩니까. 고작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그 말에 노인이 놀라는 표정으로 몇 년 만에 고향에 가느냐고 묻는다. 정씨가 십 년, 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런 말 할 만도 하다며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놓구, 추력이 수십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이 말에 영달이는 새로 공사판 일이 생기겠다구 희희낙락한다. 하지만 정씨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가 돌아갈 고향은 영영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책을 덮는다. 그는 그의 고향을 떠올려 본다. 뽕나무 밭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던 그 유년의 유토피아. 하지만 이제는 한 대학 재단에게 팔려 몇 채의 건물과 공원이 들어선 채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져 버렸다.

고향에 내려갈 때면 그는 가끔 그곳에 가보기도 한다. 그가 '오징어'나 '나이먹기'를 하고 놀던 마을의 공터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수없이 많았다. 그때 그가 친구들과 울며 싸우며 다치며 부대끼던 그 나무가 지금도 몇 그루 정도는 남아 있다. 나무 자체의 가치가 대학 재단으로 하여금 잘라내는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 고향은 한 번 떠나오면 다시 돌아가기 힘든 곳이다. 그는 '삼포가는 길'을 읽고 난 후 그런 생각을 했다. 한 번 나온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유토피아는 끝내 그 신기루만 보여주며 한 평생 사람의 마음을 허전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책을 다시 책장에 꽂는다. 다시 의자에 앉자 방금 꽂아놓은 책의 형체가 다른 책과 섞여 금세 식별이 어렵게 돼버리고 만다. 언제쯤 그는 아까의 책을 다시 빼내들게 될까. 그건 섣불리 장담할 수가 없다. 자, 지나친 감상은 약육강식의 현대사회에서 치명적인 것이 될 지도 모른다. 이제 자야할 시간이다. 그는 서둘러 컴퓨터를 끄기 시작한다.

삼포 가는 길

황석영 원작, 유동훈 각색,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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