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5

세 냥 짜리 천리준구 (5)

등록 2003.01.11 14:02수정 2003.01.11 16:28
0
원고료로 응원
"흐음! 더 없을까? 맛이 되게 좋은데…"

왕구명은 연신 손가락을 빨았다.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먹었기 때문이었다. 젓가락으로 먹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맛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회옥이 만든 십금육정은 왕구명이 동파육을 만들고 남긴 돼지고기로 만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양이 약간 모자랐다.

어떤 음식이든 배불리 먹으면 그 맛이 반감되는 것이다. 조금 모자란 듯하였을 때가 가장 맛이 있을 때인데 현재 왕구명이 딱 그런 수준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남은 음식이 없자 실망한 그는 대강 씻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으음! 저 녀석하고 나하고 둘이서 음식점을 열면…? 나는 동파육을 만들고 저 녀석은 십금육정을 만들고… 으음! 혹시 다른 요리도 할 줄 아는지 깨어나면 한번 물어봐야지. 으음! 음냐 음냐! 쩝쩝 으음, 음냐 음냐! 쩝쩝…!"

왕구명은 잠자면서도 십금육정을 먹는 꿈을 꾸는지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이회옥은 그릇이 말끔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른 것은 모르나 십정육정 만큼은 정말 자신 있는 요리였다. 모친인 곽영아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였기 때문에 하도 여러 번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부엌에 발을 들여놓으면 고추가 떨어진다면서 내쫓곤 하던 모친을 졸라서 만드는 법을 배워 두었던 것이다. 그릇이 말끔하게 비어 있다는 것은 맛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이날도 그는 하루 종일 서고에서 살았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간간이 비룡을 끌고 저잣거리로 나가보았으나 여전히 거들떠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아주 가끔 비룡을 보는 사람이 있기는 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객잔에 머무는 외지인들이었다. 그들은 가격을 물어보기는 하였지만 천 냥이라는 말에는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은자 천 냥이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는 이회옥은 어른들이 쫀쫀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으음! 저 망아지는 지금 빼앗을 것이 아니군. 보아하니 말을 돌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녀석인 듯 싶은데… 좋아, 일단 조금 더 두고 보지. 나야 손해 볼 것이 없으니."

은밀한 구석에서 이회옥을 바라보던 무천장의 노인은 오늘쯤 시행하려던 계획을 뒤로 미루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는 왕구명이 실수하도록 유도한 뒤 가차없이 자를 생각이었다. 그럼 수입이 없게 되므로 이회옥을 돌볼 형편이 못될 것이다. 그때 가서 손을 쓰면 비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비룡과 이회옥은 마치 한 몸인 듯 호흡이 너무도 잘 맞았다. 게다가 말을 돌보는 실력으로만 따지면 무천장의 어떤 마부보다도 뛰어났다. 그렇기에 아직 망아지인 비룡이 성장한 말로 변할 때까지 두고 보려는 것이었다.

"크크크! 그때까지 건초 값만 해도 어딘데… 이런 것을 두고 꿩 먹고 알 먹기라는 거겠지? 크크크!"

이회옥이 왕구명과 형님 아우 하는 사이인 것으로 미루어 당분간 산해관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 노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이회옥은 서고를 정리하면서 사기열전 중 제왕편과 명인편, 그리고 장군편을 모두 섭렵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서책들을 두루 읽어보았다. 그것들을 읽는 동안 깨닫게 된 것이 많이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휴우…! 이제 이 줄만 하면 되는구나. 아이고 팔, 다리, 머리, 허리, 삭신이야… 에구! 이러다 골병 들지…"

이회옥은 허리를 두들기면서 눈앞의 서가들을 대강 훑어보았다. 이젠 서책을 정리하는 것도 요령이 생겼다. 전에는 무조건 뽑아 놓고 일일이 분류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서가에 꼽혀있는 것을 일단 살피면서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를 구상하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익힌 것이다.

"후후! 이쪽 것들을 이쪽으로 옮겨 놓고, 이것은 저쪽으로… 흐음! 이것들은 이쪽으로 하면 되겠구나. 가만, 이건 어디에 놓지? 어디 보자… 이건 무공에 대한 것인 모양이구나. 어라? 그런데 왜 이런 그림이 있는 거지? 이, 이건 대체 뭐야? 아이고 남새스러워라. 아이고 누가 그렸는지 되게 민망하네."

후루룩 책장을 넘기며 대강의 내용을 훑던 이회옥은 벌거벗은 그림이 있자 화들짝 놀라면서 책장을 덮었다. 그러나 그 책장은 이내 다시 펼쳐졌다.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누를 수 없는 것이 바로 호기심이 아니던가!

"음양조화록(陰陽造化錄)? 이건 대체 뭐 하는 거지? 흐음! 어디 보자… 음과 양은 천지만물의 근원이며 이것들이 상생상극하면서 조화를 일으켜 만들어 진 것이 천지만물이다. 양(陽)은 건(乾)이고 음(陰)은 곤(坤)이다. 이러한 음양이외에 천지만물의 조화에 직접적으로 간여하는 것이 바로 오행(五行)이라 한다."

이회옥은 차츰 서책의 내용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지금껏 서책들을 정리하면서 비록 대강대강 훑어 본 것이지만 적지 않은 분량을 읽어본 바가 있었다. 어떤 서책은 현묘한 이치를 담고 있지만 어떠한 책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음양조화록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서책은 왠지 현묘한 이치가 담긴 듯 하였다. 하여 아예 배를 깔고 엎드렸다. 작심(作心)을 하고 천천히 읽어보려는 것이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 시도 쉬지 않고 서책을 정리하느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오던 차였다. 이렇게 엎드리면 허리의 통증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은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알게된 것이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고,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다. 땅에는 아홉 개의 주가 있고, 사람에게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다. 하늘에는 바람과 비가 있고, 사람에게는 기뻐함과 노함이 있다."

이회옥은 천천히 소리내어 읽었다. 이렇게 하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고, 더 잘 기억되기 때문이었다.

"흐음! 하늘에는 천둥과 번개가 있고, 사람에게는 음률(音律)이 있다. 하늘에는 사시(四時)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다. 하늘에는 오음(五音)이 있고, 사람에게는 오장(五臟)이 있다. 하늘에는 육률(六律)이 있고, 사람에게는 육부(六腑)가 있다."

사위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건만 이회옥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그가 일어선 것은 어둑어둑해지면서 글자가 보이지 않자 황촉에 불을 붙일 때뿐이었다.

"땅에는 십이경수(十二經水)가 있고 사람에게는 십이경락이 있다. 일년에는 삼백육십 일이 있고, 사람에게는 삼백육십 개의 뼈마디가 있다. 이 뼈마디는 하늘의 수에 짝하는 것으로…"

요상하게도 벌거벗은 남녀가 마치 뱀처럼 서로를 품고 있는 그림이었지만 옆에 있는 설명은 전혀 요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현묘한 이치를 담고 있는 듯하였다.

이회옥은 모르던 사실을 하나 하나 깨닫고 있었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음양조화록이라 쓰인 서책을 보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노곤한 피로감으로 인하여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이회옥의 처소를 찾은 왕구명은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후후! 녀석 무척이나 피곤했던 모양이군. 아무도 볼 사람도 없는데 그걸 뭐하러 치운다고 이 고생이람… 에구, 이 녀석아!"

그는 이회옥이 서고를 정리 정돈하느라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걸 이용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느냐며 극구 만류하였었다.

사실이 그랬다. 왕구명은 책 보기를 돌보듯 하는 사람이었다. 청룡무관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지만 지금껏 서고에 가본 경험은 불과 서너 번이었다. 그것도 호기심 때문에 기웃거린 것일 뿐 그 안의 서책을 가져다 읽어본 적은 전혀 없었다. 책장만 펼치면 졸음이 쏟아지기 때문에 책이라면 한두 권이면 족했다.

지금껏 끝까지 읽어본 서책이라고는 아주 어렸을 때에 문자를 익히느라 읽어본 서책이 전부였다. 따라서 서가에 갈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걸 치운다고 법석을 떨고 있자 괜히 힘만 들인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회옥은 그 일이 전혀 힘들지 않다고 하였다. 오히려 정리 정돈을 하면서 새롭게 익히는 것이 많다고 하였다.

자신이 출근하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왕구명으로서는 그가 서가를 정리하면서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였다. 하여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쯧쯧! 이 골치 아픈 책은 왜 본다고… 에구, 녀석아! 베개를 베고 자야지 이렇게 엎드려서… 어쭈! 아직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 이건 뭐지? 아, 아니! 이, 이건…!"

이회옥이 얼굴 아래 깔려 있던 음양조화록을 빼내려던 왕구명은 남녀가 벌거벗은 채 껴안고 있는 그림을 보고 가볍게 실소를 터뜨렸다. 이회옥은 이제 겨우 열두 살이다.

따라서 아직 음양의 이치를 모를 터인데도 이런 서책을 보는 것을 보면 그래도 사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서책이 어린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다 싶어 어딘가에 감춰야겠다 생각하였다.

그러던 그의 두 눈과 입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미, 믿을 수 없어. 이건…! 이건, 분명 청룡검급의 후반부야."

그렇다. 왕구명이 놀란 이유는 서책의 그림 때문이었다. 책 위에 두 팔을 깔고 엎어진 채 잠들어 있던 이회옥은 적지 않은 양의 침을 흘렸다. 그런데 서책을 빼내자 한쪽에 고여 있던 침이 소매에 묻었고, 이 상태에서 책을 뽑아내자 전체에 묻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남녀가 껴안고 있던 그림은 사라지고 대신 검을 치켜든 사내의 그림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림의 곁에는 무언가가 쓰여 있었는데 그 가장자리에는 분명히 청룡검법 제육십구초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격동하고 있는 것이다.

"휴우…! 세상에… 이것이 서고에 있었다니…"

왕구명은 지난 삼백 년 동안 그토록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던 청룡검급 후반부를 움켜쥔 채 격동하고 있었다. 오갈 데 없는 한 소년에게 베푼 조그만 정 때문에 가문의 숙원이 풀린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안내말씀]

지난 12월 28일 이후 단 하루도 빼지 않고 연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을 못보신 분들이 상당수 있더군요.
아래 보이는 "제갈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를 클릭하세요.
못 보신 부분들을 전부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전사의 후예는 내일도 계속 됩니다. 

쭈우우우우우욱!~~~ *^^*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하면서...

제갈천 배상

덧붙이는 글 [안내말씀]

지난 12월 28일 이후 단 하루도 빼지 않고 연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을 못보신 분들이 상당수 있더군요.
아래 보이는 "제갈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를 클릭하세요.
못 보신 부분들을 전부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전사의 후예는 내일도 계속 됩니다. 

쭈우우우우우욱!~~~ *^^*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하면서...

제갈천 배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땅 파보니 20여년 전 묻은 돼지들이... 주민들 경악 땅 파보니 20여년 전 묻은 돼지들이... 주민들 경악
  2. 2 재취업 유리하다는 자격증, 제가 도전해 따봤습니다 재취업 유리하다는 자격증, 제가 도전해 따봤습니다
  3. 3 윤 대통령 10%대 추락...여당 지지자들, 손 놨다 윤 대통령 10%대 추락...여당 지지자들, 손 놨다
  4. 4 '기밀수사'에 썼다더니... 한심한 검찰 '기밀수사'에 썼다더니... 한심한 검찰
  5. 5 보수 언론인도 우려한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 보수 언론인도 우려한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