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첫 눈에 반했어.
푹신한 건초 더미 위에는 이회옥이 읽고 있던 서책이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그것의 표지(表紙)에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이라 쓰여 있었다. 그가 이것을 보게된 것은 공자(孔子)가 제자인 자공(子貢)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을 본 직후였다.
손자병법을 읽은 공자는 자공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공아, 나는 손자병법을 천박한 병서(兵書)로만 알고 있었는데 정작 읽어보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명저(名著)로구나."
이에 자공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전쟁을 반대하시는 스승님께서 병서를 그렇게 극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손자가 전개한 기본원리는 백방에 통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의 이론을 정치에 적용하면 치세의 서(治世之書)가 될 수 있고, 사업에 적용하면 기업의 서(企業之書)도 될 수 있다. 처세에 이용하면 처세의 서(處世之書)도 될 수 있으니 얼마나 훌륭한 책이야? 무장(武將)들은 이것을 단순한 병서로만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이다. 이 책에 담겨있는 뜻은 모든 것에 통하는 철리(哲理)라는 말이다."
병법칠서인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위료자(尉了子), 삼략(三略), 육도(六韜),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손자이며, 이를 손자병법이라고 부른다.
오왕 합려(闔閭)를 섬기던 명장 손무(孫武)가 저술했다고도 하고, 그의 후손 가운데 전국시대 진(晋)나라에서 벼슬을 한 손빈(孫 )이 저술한 것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건초더미에 놓여 있는 것은 권이(券二)라 쓰여 있었다.
손자병법은 본시 팔십이 편으로 쓰여져 있었으나, 위(魏)의 조조가 번잡스러운 것을 삭제하고, 정수(精髓)만을 추려 십삼 편 이(二) 책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회옥이 보던 것은 뒤편이었다.
"정말이냐?"
"으윽! 아저씨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여긴 제가 매일 오는 곳이란 말이에요."
"으으음…!"
호위무사는 이회옥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초가 있는 곳에는 반쯤 말라비틀어진 만두 외에도 이것저것 잡동사니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뭉개져 있는 건초는 이곳에 한두 시간 이상 있었다는 것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호호! 그냥 놔주세요."
"으음! 아, 알았습니다."
드디어 호위무사로부터 자유롭게 된 이회옥은 목을 쓰다듬다 문득 추수옥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엇! 너, 너는…"
추수옥녀는 이회옥의 시선에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호호! 나를 본 적이 있니? 으음! 한 일 년 동안은 못 보았을 텐데… 어디에서 보았니?"
"너, 너는 그때 그… 여기 이거 가져가!"
이회옥이 품에서 꺼내 던진 것은 한 냥쯤 되는 은덩이였다.
"어머! 이건 뭐니? 은자잖아? 이걸 왜 나한테…?"
"흥! 나는 거지가 아니야. 일 년쯤 전에 네가 나한테 던져줬던 거야. 난 거지가 아니니까 그걸 받을 수 없어. 그러니 가져가!"
"일 년 전에…? 내가…?"
"그래, 네 어머니와 가마를 타고 가다가 나한테 던져줬잖아."
"그래? 으음…! 언제 그랬을까? 잘 모르겠는데?"
추수옥녀는 모친과 더불어 불공을 드리러 갈 때마다 적지 않은 은자를 지니고 다녔다. 그러다가 불쌍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한 냥씩 던져줬다. 적선(積善)을 베풂으로서 불덕(佛德)을 얻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동안 뿌린 은자가 많았기에 은자를 던져 주었던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아미(娥眉)를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리려는 것이었다.
"기억 안 나? 좋아, 그럼 망아지와 함께 있던 소년은 기억나? 그게 나야! 그 망아지는 한 마리에 천 냥은 가는 거였어. 그러니 난 거지가 아니지."
이회옥의 말에 추수옥녀는 활짝 웃었다. 은자를 던져 준 사람 가운데 망아지를 데리고 있던 소년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럼 작년에 보았던…?"
"그래!"
"미안해! 그땐 네가 오갈 데 없어 보였어. 그래서…"
"됐어! 그럼, 난 이만 간다."
"그, 그래…!"
이회옥은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이내 등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한편 추수옥녀는 갑작스럽게 멀어져 가는 이회옥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왠지 섭섭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껏 비슷한 또래와 지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얼떨결에 자신의 방명을 가르쳐줬다.
"어머! 얘, 넌 이름이 뭐니…? 난 여옥혜라고 해!"
"여옥혜…? 난, 난 이회옥이라고 해!"
이회옥이 자신의 이름을 대고 서둘러 수풀 속으로 사라지자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추수옥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은덩이를 집었다.
일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회옥은 심심할 때마다 은자를 가지고 놀았다. 그때는 매일 부서진 탁자에 못을 박던 때였다. 따라서 늘 망치를 가까이 할 때였다.
망치로 은자를 살살 두들기던 이회옥은 그것을 주사위처럼 네모 반듯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각 면에 홈을 팠다. 결국 은자는 은으로 만든 주사위로 변하고 말았다.
"어머! 어쩜… 주사위로 만들었네…?"
추수옥녀는 너무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주사위를 이리저리 매만지면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호위무사는 헛기침으로 기척을 내고는 입을 열었다.
"흠흠! 아씨, 이제 잠시 후면 해가 저물 듯합니다. 이만 하산하시지요. 장주와 마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옵니다."
"어머, 그, 그래요? 알았어요. 가요!"
호위무사의 말에 추수옥녀는 가마에 냉큼 올라탔다. 그녀의 섬섬옥수에는 이회옥의 손때가 묻은 주사위가 꼭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남해 보타암에 있더라도 산해관을 잊지 않을 그야말로 적합한 증표였다. 그렇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고향이 절로 떠오를 것이 없을까를 고심하던 터였기에 추수옥녀는 살풋이 미소를 지었다.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고, 부패하지도 않는 물건이며, 누가 보더라도 그것을 보며 고향을 떠올린다고는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이어야 하였다.
보타암에 가면 장차 정의수호대가 되어 행협을 하려는 많은 여인들이 무공연마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들에게 향수(鄕愁)에 젖어 우울해 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칫 얕잡아 볼 수도 있으므로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는 부친의 충고가 있었다. 하여 남들이 보기엔 향수(鄕愁)에 잠겨 있지 않아 보이는 것을 찾았던 것이다.
'호호! 이회옥이라고 했지…? 좋아, 단 두 번의 만남이었지만 널 잊지 않을게. 이걸 내게 줘서 고마워.'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추수옥녀는 이회옥을 떠올렸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왠지 평범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범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영상은 추수옥녀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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