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3

첫 눈에 반했어(3)

등록 2003.01.19 13:53수정 2003.01.1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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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철이 잔뜩 잡아당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힘을 주어도 못을 빼낼 수 없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는 가운데 서서히 힘은 빠져나갔다.

결국 헐떡이면서 큰 대(大)자로 활개를 벌린 채 누워 있어야만 하였다. 그런 그의 하의는 푹 젖어 있었다. 이를 악물고 참다 참다 싸고야 만 것이다.


"제기랄! 이 나이에 바지에 오줌이나 싸다니… 제길! 형이 보면 또 얼마나 놀려댈까? 에구…! 에구…!"

혼자서 투덜대던 이회옥은 서서히 날이 어두워지자 이번엔 심한 공복감(空腹感)을 느꼈다. 그리고 보니 하루종일 먹은 게 없었다. 하여 주방에 남아 있는 만두를 생각하자 입안 가득히 침이 고였다. 하지만 그것은 화중지병(畵中之餠 :그림의 떡)이었다.

바지를 걸친 채 오줌을 싸는 판국에 어떻게 주방에 가서 그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

"으으윽! 저,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아아아악! 저리 가!"

너무도 지쳐 깜빡 잠이 들었던 이회옥은 대경실색하며 고함을 쳤다. 어른 팔뚝 굵기인 시커먼 왕쥐가 옆구리를 타고 올라 가슴을 지난 뒤 얼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함 소리에 놀랐는지 화들짝 내려갔던 쥐는 잠시 후에 또 다시 기어올라 왔다. 쥐라는 놈은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한다. 오죽하면 쥐 정신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이회옥의 고함에 놀란 쥐는 또 다시 가슴을 지나 얼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악! 저리 가란 말이야! 아아아악! 저리 안 가?"


이번에도 화들짝 놀라며 사라졌던 쥐는 반각도 채 되지 않아 또 다시 기어올랐다. 이렇게 비명을 지르면 사라졌다가 다시 기어오르기를 수십여 차례가 지속되는 동안 이회옥은 차츰 진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나중엔 가슴을 지나 목 가까이 왔을 때 외마디 비명 비슷한 소리만 칠 수 있을 뿐이었다.

"하하하! 녀석, 기껏 머리를 쓰라고 했더니… 하하하! 바지에 오줌도 지렸구나. 하하하! 이제 보니 오줌싸개였군. 에구, 이 녀석아 열네 살이나 먹고도 바지에 오줌을 싸?"
"허억! 혀, 혀엉! 흐흑! 혀엉! 나, 나 좀 어떻게… 흐흑!"

깊은 잠에 취해 있던 이회옥은 얼굴을 토닥이는 왕구명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리고는 정말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바지에 오줌을 싼 것 때문에 너무 창피하고, 너무도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녀석! 지린내 때문에 못 살겠군. 자, 가서 씻고 와!"
"형, 고마워!"

갑옷이 벗겨지자 이회옥은 쏜살처럼 튀어갔다. 잠시 후 새 의 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의 두 볼은 붉게 달아 있었다. 오줌을 지렸다는 것 때문이었다.

"하하! 녀석, 그러게 우형이 뭐라고 하였더냐? 생각하면서 살라고 했지? 세상을 살면서 생각을 깊이하지 않으면 오늘과 같은 일은 또 일어날 수 있다. 지금이야 우형이 있으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너 혼자 있어야 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

이회옥은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흠!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 깊이 생각하고 실천에 옮겨라. 그러면 실수가 없을 것이야. 그래서 네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자, 따라와라!"

이회옥은 앞서가는 왕구명의 널찍한 등을 감사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줌 싼 것 가지고 더 이상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앉아라. 오늘부터는 바둑을 배우도록 해라."
"바둑? 갑자기 바둑은 왜…?"

"네게 생각하는 법을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을 헤쳐나가려면 상대의 의중을 간파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바둑은 그런 것을 알아내는데 큰 도움이 된단다."
"……!"

"상대가 어디에 어떤 수를 두려는지 알면 어떻겠어? 그 바둑을 이기겠니? 아니면 지겠니?"
"거야, 이기겠지."

"맞아! 상대의 의중을 간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렇지? 그래서 바둑을 배우라는 것이야. 그리고 또 하나, 갑옷을 걸치고 바둑을 두려면 무척이나 힘이 들 거야. 이건 네게 손가락 힘을 길러주기 위한 수련이기도 해."
"…….!"

이회옥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용수철 때문에 못을 집어 드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던가! 주먹을 쥐는 것도 힘이 드는데 바둑알을 집어드는 것은 보나마나 무척이나 힘이 들 것이다.

"이게 끝나면 다음엔 서예(書藝)를 하게 될 것이야."
"서예를…?"

"그래, 네 학문에도 도움이 되지. 그때 넌 서첩(書帖)에 있는 글자체와 똑같이 쓸 때까지 수련해야 할거야."
"……!"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있다. 바둑알을 집어들어 원하는 곳에 놓는 것과 서예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서예란 점과 선, 그리고 획(劃)의 태세(太細)와 장단(長短), 필압(筆壓)의 강약(强弱)과 경중(輕重), 운필(運筆)의 지속(遲速)과 먹의 농담(濃淡), 글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묘한 조형미를 이뤄 내는 것이다.

게다가 왕구명이 말한 서첩이라면 당나라 때 명필인 안진경(顔眞卿)이나 구양순(歐陽詢), 그리고 동진(東晋) 최고의 명필인 왕희지(王羲之)나 원나라 때 명필인 조맹부(趙孟 )의 서체가 고루 쓰여 있는 고문진보(古文眞寶)라는 서책일 것이다.

청룡무관 서고에 있는 그것은 두께만 해도 거의 한 자나 되는 두꺼운 것이었다. 거기에는 예서(禮書), 전서(篆書), 해서(楷書), 초서(草書), 행서(行書) 등 여러 서체들이 망라되어 있다.

아무런 제약도 없는 상태에서도 명필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아무나 명필이 된다면 왕희지나 구양순 같은 명필들의 성명 석 자가 지금까지 전해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용수철이 잔뜩 잡아당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글자체와 똑같이 쓰라는 것은 무리였다. 하여 막 안 된다는 소리를 하려던 이회옥은 너무도 심각한 왕구명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휴우…! 지금 와서 이야기를 하지만 우형은 재능이 부족하여 방법을 알면서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 우형이 보아왔던 사람들 가운데 네 재능이 가장 출중했다."
"형, 그게 무슨…"

이회옥은 면전에서 자신을 칭찬하자 다소 민망하여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다물어야 하였다. 왕구명의 말이 이어진 것이다.

"흠! 말을 끊지 말아라. 그건 아주 안 좋은 버릇이야. 어찌 되었던 우형은 네 재능을 보고 가보인 청룡갑을 꺼내온 것이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우선은 우형의 말을 따라라. 적어도 네가 손해 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안 그래?"
"그, 그야 그렇지만…"

"두 말 하지말고 따라라. 은자 같은 신외지물(身外之物)은 도둑이나 강도에게 빼앗길 수 있지만 네 머리 속에 담긴 지식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 너는 아직 어리니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그러니 부지런히 익혀라. 무엇이든 배워두면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이야. 알았지?"
"아, 알았어. 형!"

이회옥은 할 말이 없었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순간 왕구명은 내심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한 말은 며칠 전 장주인 사면호협이 모든 수하들을 집합시켜 놓은 자리에서 일장 훈시를 할 때 한 말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 말을 들을 때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면서 조금 더 어렸을 때 이 말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했었다.

'봐라. 나도 이 말을 듣고 바로 써먹잖니. 뭐든지 배우면 이렇게 써먹을 때가 있는 거야. 후후! 녀석 고생 깨나 하겠군.'

미소를 머금던 왕구명이 사라진 뒤 이회옥은 무언가 결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망치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못을 먼저 박지는 않았다.

한번 실수했으므로 이번엔 어떻게 못을 박아야 전처럼 되지 않을지 먼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이회옥은 자는 동안 이리저리 뒤척이지 못한다는 것이 단점이었지만 편하게 잠을 잤다.

하여 다음 날부터 어찌하면 편히 잘 수 있을지를 고심하였다. 그러면서 바둑 두는 법을 배웠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세월은 이제 다 지난 것이다.

이제 이회옥은 무슨 일이나 행동을 하든 미리 세 번은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는 성품으로 바뀌어갔다. 이렇게 세월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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