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랑의 작은 섬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3.01.20 09:55수정 2003.01.2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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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지요. 이곳은 아침부터 이슬비가 오는가 싶더니 지금은 진눈깨비가 날립니다. 바다에는 또 폭풍주의보가 내려 여행객들은 발이 묶여 있습니다. 바람이 거세지고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보니 머잖아 이곳에도 눈보라가 몰아닥칠 듯합니다.

연안 항로로 분류되었던 보길도 인근 해역이 올해부터 평수구역으로 바뀌어 뭍으로 가는 뱃길이 편해질 거라는 전망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하나의 희망에 지나지 않을 듯합니다. 바람이 평수 구역만을 비껴 불 까닭이 없는 때문이지요. 여전히 섬이란 천형의 땅이며, 섬의 진정한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고, 뱃길이 끊기는 날이면 나는 자주 바닷가 언덕으로 갑니다. 오늘은 예송리 고갯길 당사도와 예작도가 건너다 보이는 정자로 왔습니다. 이 정자는 목수 상일이 형님이 나무로 사귀를 짜서 만들었는데, 바람의 길목 한 가운데 위치해 있지만 거센 바람들을 잘도 견디어내고 있습니다.

잘 짜여진 이 정자처럼 우리 삶도 잘 짜 맞추어져 큰바람에도 흔들림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들 삶의 집이란 대개 이 작은 정자만큼 튼튼하지도 사귀가 잘 맞지도 못합니다.

이제 진눈깨비가 눈보라로 바뀌고 있습니다. 멀리 여서도와 사수가 사라져가고, 소안도까지 눈보라 속에 파묻혀갑니다. 곧 저 건너 당사도와 예작도 또한 눈보라에 휘말려 사라져가겠지요. 하지만 아직은 섬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 작은 섬들마저 아주 사라져버리기 전에 나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 주 전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내가 쓴 책을 읽고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서울에서 남쪽 끝 섬까지 먼길을 달려온 여인은 혼자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의 발이 되어 주는 벗들과 함께 이 먼 섬까지 왔습니다.

그녀는 어느 섬의 위치를 물었습니다. 나는 이 정자를 알려주었고, 그녀는 벗들을 재촉해 정자까지 내쳐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녀는 이 정자에는 오르지도 못하고 벗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오랫동안 저 섬을 바라보기만 했겠지요.


옛사랑의 섬. 그 남자가 나고 자랐을 섬을 바라다보면서 그녀는 어떤 생각에 잠겼던 것일까요. 벌써 20년도 전, 그가 저 섬에 살며 녹음 테이프에 담아 보내주었던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를 다시 듣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가 살았던 집은 어느 집일까, 그가 거닐던 해변은, 그가 오르던 나무는, 그가 가로지르던 물길은, 어디쯤일까, 어디쯤일까 헤아려 보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눈보라가 거세집니다. 이제 당사도와 예작도는 물론 예송리 앞 바다 양식장의 부표들마저 아주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람의 아픈 기억들도 저처럼 쉽게 사라져버릴 수 있다면, 사람은 늘 희망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을 것을. 그런 기억들이란 좀체 난폭한 눈사태에도 쉬이 파묻혀 버리지 않습니다.


바다를 넘나들던 편지를 통해 깊어진 도시 처녀와 섬 청년. 저 광폭한 1980년대 초반, 처녀는 은행원이었고, 도시로 올라온 청년은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그러나 연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란 모름지기 장벽이 가로 놓여 있어야만 오래 유지되는 것일까요.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새로운 생명은 늘 또 한 생명의 무덤을 뚫고 솟아납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여동생으로부터 그가 다른 여자와 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그녀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서울 근교, 어떤 도시에 일이 있었던 어느 날, 그녀는 횡단 보도 앞에 차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그가 그 도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고, 기적처럼 한번쯤 볼 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은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아이의 손을 잡고 횡단 보도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달려나가 인사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사고를 당한 후였고, 하반신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를 마지막으로 스쳐보냈습니다.

그새 눈보라가 그치고 햇빛이 나는군요. 섬의 날씨란 이렇듯 변덕이 심하여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또 햇빛이 나지만 잠시 뒤에 다시 눈보라가 몰아칠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녀는 그의 섬을 가슴에 묻고 돌아와 하룻밤을 머물다 환하게 웃으며 떠났습니다.

그녀가 그녀의 아름다운 벗들과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여러 날을 말없이 지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예전에 내가 떠나 보낸 여자일 수도 있고, 그 남자 또한 나일 수도 있는 것을. 아, 나는 대체 침묵이 아닌 어떤 언어로 사람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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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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