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민위천',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으며…

등록 2003.01.20 19:13수정 2003.01.21 12:29
0
원고료로 응원
옛말에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즉 '사람 노릇하려면 모름지기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라고 했다. 글에는 성현들의 깨달음이 담겨 있어서 후손들에게는 가르침이 된다. 현대판으로 풀이한다면, 글에는 삶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담겨 있어서 자아와 세계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저간에 연속 방영되고 있는 EBS-TV의 기획시리즈 '박석무씨의 <목민심서> 강의'를 시청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 <牧民心書>를 다시금 독서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인 1980년대 초반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한 <역주 목민심서>(전6권)를 독서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그 글이 단지 머리로는 와 닿았지만 가슴으로는 와 닿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 세월이 적지 않게 흐른 그 어느 날 1992년에 간행된 소설 <목민심서>(전5권)를 독서하는 기쁨을 지니게 되었다.

앞의 소설을 저술과 비교해 본다면, 그것이 동일한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배경에서 인물이 행하는 사건을 통하여 생동감 있게 주제적 사상을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잘 침투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소설 <목민심서>는 그 시대적 배경이 되는 200여 년 전의 조선 후기 사회의 시대상과 그 비극성을 고민하던 한 식자인의 고뇌를 쉽게 읽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한민족으로서 그 소설을 읽는 자라면 누구든 그 책자의 각 페이지마다 당대에 대한 분노와 절규 그리고 공감의 피눈물을 발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 소설의 독서 경험을 바탕한다면 다산 선생의 실학적인 글들인 '목민심서', '흠흠신서' 그리고 '경세유표'를 읽고자 할 여유와 자신을 갖게 되리라 본다. 실로 좋은 독서 경험을 하는 셈이다

"육월화미수 관가이수창(六月禾未秀 官家已修倉)..." -당나라 시인 섭이중의 '전가시(田家詩)' 중에서.
(유월이라 벼의 이삭은 아직 피지 않았건만, 관가에서는 환곡 들일 창고를 수리하더라....)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 /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萬姓膏)
촉루락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춘향전>의 '이 어사의 절구'
(호사스런 술독의 맛있는 술은 만백성의 피이요, 옥쟁반의 맛난 고기들은 만백성의 살점이 라, 밝은 촛물 녹아 내릴 때 백성들은 눈물을 쏟고, 노랫소리 가득한 곳에는 백성들의 원망 소리 드높도다.)



조선 후기 18-9세기, 양반 관료들은 사리사욕을 위해 매관매직과 가렴주구을 자행함으로써 타락과 부패의 극치를 연출하여 허기와 남루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에 닿아, 민중의 구원자요, 당대의 혁명가인 일지매(一枝梅), 장길산(張吉山), 임꺽정(林巨正) 등을 애타게 염원하던 그 때, 다산 선생(정약용: 1762-1836. 조선 순조 때의 실학자)는 목민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고 백성들의 피눈물을 슬퍼한 바 있다.

"오늘날의 사목들이 오직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조급하고 어떻게 목민을 해야 하는 줄을 몰라서 백성들은 여위고 곤궁하고 병까지 들어 진구렁 속에 줄을 이어 그득한데도 사목하는 자들은 바야흐로 아름다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혼자 살이 찌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날마다 거둬들인 돈꾸러미를 헤아려 낱낱이 기록하고, 돈과 피륙을 부과하여 전답과 주택을 장만하며, 권세 있는 재상가에 뇌물을 보내 뒷날의 이익을 기다린다."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웠고, 상경 후 이익의 유고(遺稿)를 보고 민생을 위한 경세(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으며, 이벽(李蘗)에게 서학(西學)을 배웠다. 이어 어사 관리가 되어 지방행정의 부패상과 농민의 빈곤상 등을 보고하는 등 민중의 삶에 많은 애착을 드러내었다.

순조 1년(1801) 신유교란(辛酉敎亂) 때 '황사영 백서사건(帛書事件)'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그 곳 다산 기슭에서 18년 동안 경서학(經書學)에 몰두하여 정치기구의 전면적인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동력을 기준으로 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도의 폐지 등을 주장하는 많은 저술을 했다.

다산 선생이 유배된 처지에서도 백성에 대한 사랑을 어쩔 수 없어 쓴 책 <목민심서>는 관리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기록하여 목민의 바른 자세를 밝힌 것인데, 전 12편(赴任부임, 律己율기, 奉公봉공, 愛民애민, 吏典이전, 戶典호전, 禮典예전, 兵典병전, 刑典형전, 工典공전, 賑荒진황, 解官해관)에 각 편을 6조로 하여 총 72조의 48권 16책으로 되어 있는데, 지방 관리의 폐해를 지적하고 지방 행정의 쇄신을 기하여 백성들이 평안한 삶을 살게 하고자 하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민이토위전, 이이민위전(民以土爲田, 吏以民爲田)"(백성들은 땅을 일구어 어렵게 사는 반면, 관리들은 백성들을 등쳐먹고 호사를 누린다. -위의 책 '이전 편의 속리 조')이란 진술에서 발견되듯, 조선 후기 부패의 극에 달한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의 문제와 공직의 본무와 결부지어 소상하게 밝힌 이 <목민심서>가 지향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기(正己)와 청백(淸白)의 정신에 입각한 공직의 청렴과 절검, 그리고 봉사의 정신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민(牧民), 즉 '민중을 사랑하는' 애휼(愛恤)의 자세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존립하고 정치가 행해지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국민들을 잘 살게 하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니, 만일 국민이 못살게 된다면 국가나 정치는 곧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왕이민위천(王以民爲天)"(왕은 백성을 하늘처럼 받든다. - <서경>)
과거에는 황제의 자리 뒤에 청룡문이, 왕의 자리 뒤에 봉황문이 드리워져 그 권능과 위엄의 상징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 우리의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자리 뒤엔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란 슬로건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어 한결 정겹게 느껴진다. 그것은 분명 '이 땅의 민중들이 사회·역사적 삶의 주체이다'란 것을 표명함이다.

그런데 그 슬로건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과연 이 땅의 국민들은 자신의 행복과 국가의 공동선(共同善)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응답으로는 어설픈 게 사실이다. 하여,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란 슬로건에 걸맞는 우리의 자세를 추스려 보자.

'우순풍조 함포고복(雨順風調 含哺鼓腹) 백성들은 처처(處處)에 격양가(擊壤歌)라'(비바람 순조로와 배부르고 등 따스워 곳곳마다 백성들이 태평성세 노래한다. -<완판본 춘향가> 1절.)
중국의 성군 요 임금의 덕치·선정으로 백성들은 고복격양(鼓腹擊壤; 기뻐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침. -<십팔사략>)하며 '격양가'를 불렀다 한다.

"해가 뜨면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네./ 밭을 갈아서는 먹고 우물을 파서는 마시니/ 임금님의 힘,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제 국민 모두가 대통령이니 이 나라의 미래는 곧 우리 국민의 손에 달렸다. 우리 모두 함께 더불어 지난날의 허무와 절망, 허기와 남루를 벗어나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격양가'를 부를 수 있도록 노력하자.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지금이 바로 그 때임에랴!

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창비, 200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3. 3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자기들 돈이라면 매년 수억 원 강물에 처박았을까"
  4. 4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5. 5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