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1세기 첫 대통령 선거, 노무현 정권의 탄생은 정정당당한 미래지향 세력이 기회주의와 과거회귀 향수에 젖어 허덕이던 세력을 유권자의 힘으로 제압한 진정한 선거혁명이었습니다.
소량 다품종을 생산하는 작은 회사(민주당)가 중후 장대형 제품생산을 고집해 온 거대기업(한나라당)을 이겼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디지털 조직이 아날로그 집단에 앞설 수밖에 없다"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메이저 언론의 음모와 왜곡이 더 이상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확인은 언론개혁의 당위성을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입증해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전에서 보여준 양당 캠페인은 현저한 수준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중·동 일보는 구태의연한 '경마식 보도'에서 탈피하지 못했고, 한나라당은 여기에 부화뇌동했습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수면에 일어나는 작은 파도에 반응하면서 일희일비했다면 민주당은 기타 언론과 인터넷이라는 바다 속 거대한 해류(海流)의 움직임을 읽어냈다는 얘기가 됩니다.
노무현의 당선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유권자의 반란'이었고 특권 기득권층의 반발과 냉전 수구세력의 부활을 기적처럼 제압한 서민들의 일대 반격이었습니다. 기존 정치판의 가치관으로 보면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노무현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민주당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경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그에게 당선 가능성은 고사하고 민주당 후보가 될 가능성마저도 희박했다는 정황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노무현은 불가능하다"는 집권 여당의 후보를 쟁취해 내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노무현의 당선은 반대자들에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케인즈나 서청원 대표가 말하듯 이것도 "보이지 않은 손"이 작용한 것일까요? 어쨌든 민주당 안팎의 온갖 악랄한 저지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가장 허약했던 후보가 가장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회창이 3500만 '유권자 폭풍'과 대면했을 때, 자멸해서 무너지는 고목이었다면 노무현은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는 잡초였습니다. 노무현이 온 몸을 던져 통과한 5차례의 '지옥 문'이 그런 모습으로 비친다는 뜻입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 300일의 기록이 불가사의를 상식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2002년 봄, 민주당이 사상 최초로 실시한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6월 지방선거, 8월 국회의원 재 보선에서 참패한 이후, 다시 벌어진 민주당 내의 지극히 불순했던 후보단일화 음모, 그리고 투표일 하루 전날까지 이어진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철회 등, 타락한 정치판에 일찍이 없었던 '여·야가 총동원 된 노무현 죽이기'가 5차례나 이어졌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실 것입니다.
노무현이 죽을 고비를 5번이나 넘기면서 오뚝이처럼 눈물겨운 승리를 일구어 낸 진정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노무현 당선 직후 언론이 쏟아낸 다양한 원인분석과 용비어천가에 가까운 미사여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아마도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유권자들 각자의 고심 어린 '진실 찾기 게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말없는 유권자들의 신중한 선택은 낡고 정신적으로 병든 세대의 '허위'를 벗겨내고 '진실'이 제 자리를 잡도록 각자가 당당한 심판자로, 유권자들 스스로 양심을 시험한 결과였다고 보고 싶습니다.
여러가지 점에서 지난 1년 동안 '노무현 죽이기'를 반전시킨 선거혁명은 대한민국 현대사 50년의 모순을 압축해서 보여준 기간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난 2002년은 한국 정치판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한 해였지만, 이제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정치판에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 즉 "정치인의 옥석(玉石)을 가려내야 한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이런 때에 '민주당 살생부'가 떠도는 의미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전쟁이 끝났을 때, 상식적인 논공행상이 가능하고 신상필벌이 따라야 할 당내 권력투쟁에서 엉뚱한 세력이 공로를 차지하려는 파행에 대한 반발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구체적으로는 사이비 정치인, 정치꾼, 정상배들을 지속적으로 걸러내고 퇴출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맹수에 쫓기듯 정신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정치인들은 요즘, 떠밀려 나가는 볼썽 사나운 꼴을 보이기보다 자연스러운 당내 권력투쟁을 거치면서, 스스로 물러설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때만 되면 보따리 싸들고 돈 냄새를 쫓아, 혹은 개인 야욕을 채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무리를 정치판에서 격리하는 작업은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어차피 내년 총선에서 확실한 마무리를 하게 되겠지만 새 정부의 개혁은 빠를수록 효과적이기 때문에 강조하는 말입니다. 쓰레기를 방치해놓고 정치판을 바꾸라고, 언론을 개혁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미신을 되풀이해서 신봉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봅니다. 이제 정치판에서, 먼저 민주당에서부터 떠나야 할 사람들은 확실하게 가려내고 당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이 대한민국 선거혁명의 불씨를 심었던 것처럼, 민주당이 철저한 권력투쟁을 통해 다시 한 번 스스로 옥석(玉石)을 가려내고 국민 앞에 거듭 태어날 때, 정정당당한 정치, 노무현 정권의 새로운 희망은 정치개혁을 이루어 내고 나아가 대망의 언론개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노무현 대통령이 전능하다 해도 개혁은 혼자 할 수 없는 것. 집권 민주당의 개혁이 최우선 과제라는 뜻입니다. 민주당이 개혁정당으로 거듭나면 한나라당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대선후보 국민경선'에서 이미 시범을 보였습니다.
양당이 우여곡절 끝에 정치개혁을 이루어 내면 언론개혁의 단초는 스스로 열리게 될 것입니다. 정치개혁 없이 언론개혁을 말하는 것은 허구이고, 신기루를 쫓는 일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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