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칠 팔 세 가량 되어 보이는 그녀는 한 눈에 보기에 적어도 이백 근은 족히 나갈 정도로 뚱뚱한 여인이었다.
"야, 잘 들어. 저 사내는 지금부터 내 꺼야. 누구든지 침 흘리면 가만 안 둘 꺼야. 알았지?"
"피이…!"
"어쭈…? 감히 내게 기어오르려고? 뒈지고 싶어?"
"아, 아니야. 저 사내는 네 꺼야. 왕 언니 마음대로 해."
바짝 마르고 기미가 잔뜩 낀 여인은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왕 언니라 불린 여인은 뚱뚱한 몸매를 빗대어 백만근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천애화(千愛花)였다.
그녀는 이곳에서는 보타신니를 제외하고는 최고령이었다. 나이 스물 둘에 이곳에 들어와 관문에 도전하였다가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천하 각지에 산재한 무천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금릉(金凌) 무천장 출신이다.
장주인 약영혈돈(躍影血豚) 천일평(千一坪)에게는 자식이라곤 그녀뿐이었다. 그 역시 아들을 낳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천애화를 이곳에 보내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다. 대를 잇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십여 년 동안 열 명이나 되는 첩을 얻었지만 끝내 회임 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젊은 시절 무공을 익히던 중 실수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고환을 다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새로 얻은 첩이 회임을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가 아들을 낳기만 하면 천애화는 보타암까지 올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부녀는 출산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새로 태어난 아이에겐 고추가 달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타암에 발을 들여놓기 전, 백만근은 이미 처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금릉에 있을 때부터 육중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지독한 박색이었다. 따라서 금릉의 사내들 가운데에는 그녀를 거들떠보는 사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무천장에 있던 하인 가운데 하나는 달랐다. 어떻게든 천민 신분을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기꺼이 백만근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래서 팔자를 고치려 하였던 것이다.
약영혈돈의 유일무이한 사위가 되면 천한 하인 신분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장차 무천장 장주직을 계승할 수도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였다.
나중에 권력을 쥐게 되면 그때 가서 삼처사첩을 두어도 누구하나 제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약영혈돈은 분노하였다. 천한 하인 따위가 순진한 여식을 꼬여낸 뒤 청백을 깼다 생각한 것이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그 하인은 장형(杖刑)으로 다스려진 끝에 병신이 되어 쫓겨났다.
보타암에 도착한 이후 백만근은 자신도 다른 여인들처럼 호위무사를 둘 생각을 품고 서찰을 보낸바 있었다. 하지만 금릉에서 온 것은 시중을 들어줄 시비들뿐이었다. 자칫 여식이 문란해 질 것을 저어한 약영혈돈의 조치였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쥐새끼가 안 보인다는 말이 있다. 현실적인 성품을 지닌 백만근은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보타암에 있는 수많은 호위무사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자를 납치했다. 그는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이었다.
무공이든 힘이든 백만근을 당해낼 수 없던 그는 강제로 최음제를 복용하였다. 그리고는 색에 미친 한 마리 짐승이 되어 그녀의 욕망을 해소해 주었다.
이후 그녀는 더 많은 최음제를 구입하느라 막대한 은자를 써야 하였다. 그 결과 이곳에 있는 삼천여 무사들 가운데 적어도 일 할은 건드릴 수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무공 익히기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현재 그녀의 무공 수위는 보타암 최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문 돌파에 실수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나가봤자 부친의 엄중한 감시망 하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껏 즐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보타신니를 비롯한 무공교두들은 여인들이 무엇을 하든 내버려두었다. 그렇기에 화려한 전각을 지을 수도 있는 것이고, 시비와 호위무사까지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곳이다. 하여 일부러 실수한 것이다.
백만근은 육중한 몸매와 무공, 그리고 막대한 은자로 이곳을 장악하고 있다. 그렇기에 왕언니로 불리며 군림하는 중이었다.
"가만 있어봐! 내가 가서 옥혜 그 계집애와 말 좀 해야겠어."
몸을 일으킨 백만근은 왕구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전각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욕망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다른 여인들은 그를 측은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면 보타암 최고 박색(薄色)의 배 위에서 허우적거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여옥혜는 분명 백만근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지금보다 훨씬 고달플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집단적인 따돌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산해각에는 단 하나의 시비도, 호위무사도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먹을 음식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고 농사를 직접 짓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는 일종의 저잣거리 비슷한 곳에서 음식을 만들 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백만근의 눈에서 벗어나면 누구도 재료를 팔지 않을 것이다. 저잣거리 자체가 백만근이 주인인 금릉각 소유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아직 고수가 되지 못하는 추수옥녀로서는 살기 위해서라도 굴복해야 할 것이다.
한시바삐 산해관으로 돌아가려던 왕구명의 계획에 차질이 발생될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그는 검박한 주변을 둘러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
"에잇, 이번엔 반드시 잡는닷. 야아압!"
기합성과 더불어 봉은 쾌속하게 허공을 꿰뚫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목표를 약간 빗나가자 이회옥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껏 수 없이 시도했으나 번번이 이 모양이었다.
지난 이틀 간 거의 쉬지도 않고 봉을 휘둘렀지만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았다. 하여 숨이 턱에 찰 정도로 지쳤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오기가 솟았다.
"젠장! 대체 왜 안 되는 거야? 이 정도로 연습을 했으면 이젠 좀 맞아 뒈져야 할 것 아냐! 에이, 빌어먹을 놈들…!"
거친 숨을 몰아 쉰 이회옥은 흘러내리는 땀을 소맷자락으로 닦아내며 예리한 시선으로 허공을 살폈다. 그의 표적은 허공을 날아다니는 파리(蠅)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청룡무관의 해우소 가운데 가장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곳이었다. 파리가 가장 많기에 이곳을 택한 것이다. 과연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파리들이 약올리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에잇! 모두 뒈져랏! 얍! 얍! 야아압!"
붕―! 붕―! 부우웅―!
성질이 난 이회옥이 마구잡이로 봉을 휘두르자 즉각 예리한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이 온통 굳은살로 가득 하도록 고련을 한 결과였다.
파공음과 동시에 파리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가운데 재수 없는 파리 한 마리가 봉과 정면충돌하면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퉁겨져 나왔다.
죽은 놈은 엉덩이 부분이 황색과 녹색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분에 앉아 손을 비비던 똥파리였다. 따라서 봉과 충동하면서 튀어나온 것은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얼굴로 날아오자 이회옥은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 기합성을 토하며 봉을 휘두르려 입을 벌린 순간 입안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허억! 이런…! 퉤에! 에이, 더러워! 퉤퉤!"
이회옥은 수없이 침을 뱉고 있었다. 그런 그는 청룡갑을 걸친 채 매일 인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련을 거듭한 끝에 이젠 제법 빠르게 봉술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처음 걸쳤을 때에는 찌르기를 백 번만 해도 다음 날이면 봉을 드는 것조차 힘겨워하여야 하였다. 가슴과 팔 근육에서 뻐근한 통증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매일 삼천 번씩 찌르기 수련을 해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달팽이가 기어가는 듯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봉도 요즘엔 제법 속도가 붙어 있었다. 하여 새로운 수련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봉에는 단봉(短棒), 중봉(中棒), 장봉(長棒)이 있다. 이것들은 길이에 따라 각기 다른 효용이 있다.
이 가운데 이회옥이 선택한 것은 장봉이었다. 검보다 길이가 길어 유리할 것 같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봉은 찌르고, 두들기는 것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병장기이다.
반면 창(槍)은 찌르는 것에 중점을 둔 병기이다. 이것들의 차이는 뾰족한 날이 달려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그렇기에 창은 봉을 대신할 수 있지만, 봉은 창을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 봉은 창처럼 살을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봉술에 웬만큼 자신이 생긴 이회옥은 혹시 다른 수련 방법이 없나 싶어 만병무예통지를 살피던 중 새로운 수련방법을 고안해 냈다. 아직은 내공이라는 것이 없지만 나중에라도 제대로 된 운기심법을 익히게 되면 봉에 진기를 주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정확하게 상대의 혈도를 제압할 수 있다면 굳이 뾰족한 날이 달린 창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병장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수련 방법이 바로 날아다니는 파리를 봉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안내 말씀]
앞 부분을 보지 못하신 분은 이 글 바로 아래에 있는 <제갈천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를 클릭하십시오. 전체 리스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메인 화면에서 기사검색을 클릭하시고 기자명에 "제갈천"을 입력하셔도 전체 리스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는 문화면 좌측 중간쯤에 있는 연재실 목록에서도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제갈천 배상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