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할머니의 까칠까칠한 손길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23)

등록 2003.01.28 23:34수정 2003.01.2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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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은 추억에 산다"더니 반백이 넘은 이제는 한가한 시간이면 자주 여러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마다 교육자의 보람을 맛보기도 하지만, 내 손으로 제적했던 녀석들이 떠오르면 구제치 못한 회한의 아픔에 간장이 몹시 저린다.

가장 첫 번 학생이 정군이었다. 오산중학교 부임 이듬해 2학년 11반 담임이었던 나는 개학 첫날 결석이 없는 반을 만들겠다고 학생들과 다짐했건만, 일주일도 안 돼 그 녀석이 가장 먼저 출석부에 결석으로 올랐다.

그 후로도 그의 결석은 다반사였다. 눈동자가 흐리고 얼굴에 핏기를 잃은 그가 다시 자리를 메워줄 때는 약속을 저버린 미움보다 연민의 정이 앞서 다시는 결석을 말라고 타일러 보냈지만, 며칠 후면 다시 자리를 비워서 나뿐 아니라, 학급 학생들의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학교에서는 전교생의 출석률을 높이는 방안으로 한 달간 결석이 없는 학급은 다음달 첫 운동장 조회 시간에 표창장과 아울러 약간의 상금을 주었기에 담임보다 학급 학생들이 더 출결에 신경을 쏟았다.

그럭저럭 두 달이 지났는데 녀석은 지난 학년도 납입금이 미납이라 등교정지 통고가 나왔다. 녀석은 그런 낌새를 알았는지 그 즈음엔 숫제 매일 자리를 비워서 하는 수 없이 학생 편에 부모님을 학교로 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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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소혁

정군의 할머니가 왔다. 일흔은 훨씬 지났을 듯한, 주름이 잔뜩 진 초라한 차림의 할머니였다. 부모님이 오면 단단히 일러드리겠다는 나의 속셈은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긴 말씀을 늘어놓았다.

“선생님. 손자손녀가 자그마치 열이라오. 아범은 목수 일을 하는데, 요새는 일거리가 없어서 놀고 있어요. 어멈은 이태째 병을 앓고 있어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라오.


걔 위 손자들은 중학교 문전도 못 갔어요. 모두 공장 직공, 점원 노릇밖에 못해요. 제 아범은 보낼 수 없다는 걸 내가 우겨서 중학교에 입학시켰는데, 그 못된 녀석이 이 할미 마음을 몰라주고 학교에는 가지 않고 엉뚱한 곳에 가서 놀기만 하니 선생님 볼 낯이 없소.

이 늙은 게 무슨 영화 보고자 입학시켰겠소. 저 하나만이라도 눈을 제대로 뜨게 해 막노동꾼은 면해 주려고 그랬는데….”

이튿날 할머니가 정군의 손을 잡고 조회 중인 교실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녀석이 등교하자 반 아이들은 일제히 박수로 맞았다.

며칠 후 다시 할머니가 왔다. 할머니는 고쟁이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얼른 내 주머니에 넣었다.

“요전에는 염치없었소. 약소하지만 늙은이의 성의로 받아 태우시오.”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손수건에 똘똘 말린 돈을 꺼내 놓았다.
“내 반지를 판 돈이라오.”

나는 할머니를 서무실로 안내했다. 등록 마친 할머니를 배웅하면서 차비를 드렸다. 할머니는 극구 사양하다 받아 쥐고서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까칠까칠한 손길 - 바로 내 할머니의 촉감이었다. 할머니는 몇 발자국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어째 선생님이 좋구려. 자주 찾아오고 싶소만 늙은 게 주책일 것 같아 전화나 가끔 할 테니 전화번호나 적어 주구려.”

그 이후 두 달여 동안 정군은 그런 대로 자리를 메웠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생기가 없었고, 눈동자는 언제나 초점이 흐렸다.

그는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면 창가에서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기만 했다. 2기분 등록금 납부 기간이 지난 지 오래되었다. 또 할머니가 찾아왔다.

“언제까지 내야 하오?”
“여름방학 전까지는 내야 합니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만 참아 주구려. 뭐라도 해서 돈을 벌려고 해도 늙은이에게는 일감이 없다오. 내 여름방학 동안 김포 쪽에 가서 밭일 품이나 해서 마련해 볼 테니.”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자 할머니는 약속대로 찾아왔다. 입술이 부르트고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렸다. 일감이 시원찮아 여태 모아도 조금 모자라니 얼마간만 말미를 달랬다.

정군은 또다시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그런 중,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불광동 딸네 집에 있는데 손자 녀석 학교 잘 다니느냐는 안부 전화였다.

며칠 전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내 대답에 할머니는 긴 한숨과 함께 오늘 집으로 가서 내일은 손자를 데리고 꼭 등교하겠다면서 선생님 속을 늘 썩혀서 죄송하다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이튿날, 할머니도 정군도 등교를 않았다. 2교시 수업을 끝낸 후 교무실로 돌아오자 얼굴이 파리한 부인이 기다렸다. 얼른 보아도 심한 병을 몹시 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군의 어머니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집안 형편상 도저히 중학교에 보낼 수 없는데 어머님이 한사코 우겨서 입학을 시켰어요. 형편대로 살아야지요. 애 아버지 도장 갖고 왔으니 제적 처리해 주세요.”
“…….”

나는 말없이 도장을 건네 받았다.
“내년에라도 형편이 나아지면 학교로 찾아오세요.”
어머니는 애써 울음을 참은 채 하염없이 창 너머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퇴원서에다 도장을 찍은 후 돌려 드렸다.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총총히 떠났다. 나는 몹쓸 일을 한 것 같아 그 날 내내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정군이 제적된 지 얼마 후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는 울음을 터트렸다. 끝까지 속 썩혀 미안하다는 말씀과 함께, 손자 녀석은 학교를 그만 두었지만 선생님을 보고자 가끔 찾겠다는 애절한 음성이었다.

그 녀석 동창들이 모두 졸업할 때까지도 정군도, 할머니도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1990년대 초까지는 이런 일이 더러 있었다. 최근에는 등록금 때문에 등교정지를 당하는 일은 거의없다. 교육청에서 저소득층 자녀들에게는 학비를 보조해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올해는 내가 이 업무를 담당하였던 바, 학교에서 등록금 감면혜택을 받는 학생은 약 120여명으로 전체 학생의 약 8%나 되었다. 요즘은 학비 때문보다 학교생활에 적응치 못하고 자퇴하는 학생이 대다수다.

덧붙이는 글 1990년대 초까지는 이런 일이 더러 있었다. 최근에는 등록금 때문에 등교정지를 당하는 일은 거의없다. 교육청에서 저소득층 자녀들에게는 학비를 보조해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올해는 내가 이 업무를 담당하였던 바, 학교에서 등록금 감면혜택을 받는 학생은 약 120여명으로 전체 학생의 약 8%나 되었다. 요즘은 학비 때문보다 학교생활에 적응치 못하고 자퇴하는 학생이 대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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