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새벽이 저문다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3.02.03 08:20수정 2003.02.04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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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새벽, 할머니는 언제처럼 일찍 깨셨다
어머니는 밥을 차리신다
부엌 방 한 귀퉁이, 아버지 혼자 밥을 드신다
설날 새벽 경비원 일 나가는 늙은 아들을 보며
할머니는 연신 눈가를 훔친다


동생은 혼자 부엌방 바닥에 잠들어 있고
어머니는 아버지 도시락을 챙긴다
어미와 사는 어린 조카는 오랜만에 만난 아비가 그리운지
자꾸 동생 품을 파고든다
눈이 움푹 패인 어머니, 손자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설날 새벽이 저문다

(졸시, '설날 새벽이 저문다' 전문)


내가 이 시를 쓴 것은 작년 설 무렵이었습니다.
잠깐 사이에 또 일년이 갔고, 올해도 나는 설을 쇠기 위해 다시 인천으로 왔습니다.

함께 떠나온 고향, 아들은 먼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부모님은 여전히 타향에 삽니다. 고향에서 함께 살자고 몇 번을 말씀 드렸지만 부모님은 고개를 저으셨지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부모님의 심사를 나라고 어찌 모르겠습니까.


가난한 기억들,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추억들. 하지만 섬 생활의 고단함이 부모님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의 섬은 더 이상 옛날의 섬이 아닙니다. 식량 걱정은 사라진지 오래고, 교통의 불편함 또한 옛일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섬은 바다 양식기술의 발달로 역사상 어느 때 보다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고통스러운 지난 삶이 현재의 삶을 규정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고난에 찬 과거가 늘 현재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삶이 누추하다면, 과거는 여지없이 현재의 발목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가 자부와 긍지로 가득하다면 과거의 어떠한 고난도 오히려 자랑스런 무용담이 되겠지요.

부모님 자신이 느끼기에 부모님의 삶은 성공적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섬을 떠나왔으나 부를 얻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명예나 권력을 얻지도 못 했습니다. 금의 환향은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만큼의 재물도 모으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평생을 이어온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늙도록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몸마저 병들었으니, 부모님은 결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겠지요.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는 고향도 더 이상 따뜻한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모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것이겠지요.

섣달 그믐 날, 설날 차례를 모십니다.

도시에서 30년을 살아왔지만 섬에서의 풍습대로 부모님은 여전히 설날 아침이 아니라 그믐날 밤에 차례 상을 차립니다.

오늘밤, 작년처럼 늙은 아버지는 야간 경비 일을 나가셨고, 어머니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자리에 누웠습니다. 동생은 파산자가 돼 집으로 돌아왔고, 외가에 사는 어린 조카는 잠시 다니러 왔으며, 나는 저 혼자 안빈낙도하며 섬에 살다 왔습니다.

섣달 그믐밤이 깊어갑니다.

이제 거래를 하고 차례 상을 물리면 곧 설날 새벽이 다가 오겠지요.
그렇게 또 설날 새벽이 저물어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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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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