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첩산중 두루 적막 비워둬도 좋았을 것을...

비슬산 가는 길

등록 2003.02.04 05:25수정 2003.02.0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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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기
유가사 일주문에서 올려다본 비슬산. 비슬이란 비파와 거문고를 이름이다.

내 얼마나 비슬산에 가고 싶었던가. 심진 스님의 음반을 손에 넣게 된 1990년대 초 이래 비슬산 산행은 내 오랜 바램이었다.<그대를 위한 詩>라는 심진 스님의 애조 띤 목소리로 듣는 <비슬산 가는 길>은 꿈꾸지 않은지 오래된 내 발의 무의식적 본능을 자극해오곤 했다.


비슬산 굽이 길을 스님 돌아 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이어질 듯 끊인 연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 두루 적막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바랑하나 등에 걸치고 구비구비 만경을 걸어가는 노스님의 그림자에 묻어 언젠가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을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그렇게 걸어서 짙고 옅은 먹빛 속에 잠든 옛 절에 들리라. 그리하여 유정란을 낳는 암탉처럼 고즈넉한 그 절간에 들어앉아 무정란 같이 시들어버린 내 삶을 구원받고 싶었다.

안병기
옥유(瑜)절가(伽) 자라, 유가사란 구슬 같은 절이란 뜻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이름이 아름다운 것치고 실(實)이 있는 것 만나지 못했다.


대웅전 앞에 쓰여져 있는 절에 대한 설명을 읽어 나가다 보니 이 절의 유가사란 이름이 유가종이란 종파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마침 옆을 지나던 스님에게 유가종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으나 모른다 한다. 유가종 혹은 유식종이란 법상종의 별칭이 아니던가. 할(喝)!!

시간은 벌써 오후 두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겨울산은 재빨리 제 모습을 어둠의 부대 자루 속에다 가두어 버린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난 지체없이 절 오른 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었다. 한 시간 남짓 산새 한 마리 울어주지 않는 적막에 쌓인 산을 올라서 마침내 산 정상 바로 아래 있는 병풍 뜸에 다다랐다. 암벽이 제법 험해 보였다. 하켄 없이 그냥 맨몸으로 오를 수 있을까.힘 겹게 암벽을 올라서자 비슬산 정상인 1084m 높이의 대견봉까지는 지척이었다.


안병기
대견봉 옆 산불감시초소 근무 공무원에게 부탁해서 사진을 찍었다.

안병기
이곳의 억새들은 모두 키가 작다. 저들은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게 안전하다는 생존의 법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 순간 나는 본능이라는 매우 경멸 섞인 언어(言語)와 지혜라는 지극히 품위 있는 언어(言語)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를 생각했다.

대구 앞산(대덕산) 줄기가 길게 뻗어있다. 세상의 어떤 명예나 권세도 저 같은 산맥의 유장함을 결코 따르지 못한다.

산림 감시초소 근방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왼쪽 능선 저 멀리로 낙동강 줄기가 굽이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강물은 결코 집착하는 법이 없이 묵묵히 흘러갈 뿐이라고. 이 비유가 나를 미치게 한다. 나는 내 자신이 결코 비범한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의 생애에 어찌 저 강물의 길 밖에 없을 것인가.

김해화의 시집(詩集) <인부수첩>에 들어있는 <억새풀이 되어>라는 시가 떠올랐다.

안병기
우리 억새풀이 되어야 써
칼날처럼 뜻 세운 이파리로 바람까지도
비겁한 하늘이라면 하늘까지도
목베어 거꾸러뜨리고
서 있어야 써 우리 억새풀이 되어

사랑과 미움을 가릴 줄 알아
사랑이라면 뿌리째 뽑혀 죽어도 좋은 복종으로
미움이라면 그런 사랑까지도
사정없이 썸벅썸벅 베어버리는 반란으로

하나 보다는 둘, 둘 보다는 넷
넷보다는 더 많이 더 많이 모일 줄 아는
억새풀
바람 사나울 수록
어둠이 깊을 수록 또렷이 깨어나
소리지르며 눈 부릅뜨는 풀
여리디 여린 풀 아니고
뼈있는 풀

우리 억새풀이 되어야 써

-시 <억새풀이 되어> 전문


<인부수첩>이 나왔던 1986년 당시 이 시의 목소리는 얼마나 결연했던가. 그러나 이 순간에 내가 읊조리는 이 시의 목소리는 우리 시가 타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투성으로 가득차 있다. 도대체 똑 같은 시 한 수를 전혀 상이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만큼 무엇이 그토록 변해버린 것일까. 서기 1986년과 2002년 사이에서 내 방향감각은 길을 잃는다. 오후 4시가 가까워진다. 하산을 바삐 서둘러야겠다.

안병기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도성암이라는 암자 앞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 한 그루. 고 김남주 시인의 시 <옛 마을을 지나며>가 머리 속을 스쳐간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진달래 나무 군락을 지나 도성암을 거쳐 유가사 쪽으로 내려왔다. 벌써 사방이 어둑어둑 해진다. 나는 유가면 음리 언덕받이를 천천히 내려왔다. 심진 스님의 노래 <비슬산 가는 길> 한 소절을 나즉히 불러본다.

만첩첩 두루 적막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문득 아쉬움에 뒤돌아서서 비슬산을 힐끔 쳐다본다.
나 쓸데없이 왔다 간다. 만첩첩 두루 적막 비워둬도 좋을 것을... 이 불쌍한 중생... 전생에 나는 멧새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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