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 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도 낯설어 당혹스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의 눈은 타인의 행동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과 행동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거울을 보는 순간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보일 수도 있고, 또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떤 결점이 생각한 이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모습은 어느 경우이든 세상 사람들은 다 보고 있지만, 오히려 자기 혼자만 모르는 것이기가 쉽다. 아니면 그 모습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애써 피하고 싶었던 자신의 결점일 수도 있겠다. 물론 똑같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도 사람에 따라 그에 대한 느낌은 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거울을 들여다보듯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찰(省察)할 필요를 절감한다.
'사회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산다는 것'이라는 부제가 붙은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이라는 책을 거듭 읽으면서, 나는 그의 글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했다. 나에게도 이미 살아오면서 붙은 이러저러한 '상징 자본'이 얻어졌기에 우리 주위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의 권익에 대한 관심을 말하면서도, 정작 행동이 따르지 않는 관념에 머무르지는 않았는지. 진정한 '연대'의 정신이란 무엇인지. 홍세화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마치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한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많은 경우 타인들의 약점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지적하며 비판하곤 하지만,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적당히 양비론(兩非論) 혹은 양시론(兩是論)으로, 마치 자신이 판관인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글들을 대중 매체를 통해서 숱하게 보았다. 이 사회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글이 때로는 주목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얼마 전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부 인사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상징 자본'을 등에 업고 무지와 궤변으로 점철된 글을 대중매체에 기고하는 용기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때문에 세상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준열하게 꾸짖는 지식인들의 역할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대중의 눈에 비친 '지식인'은 현실에 한 발짝 비켜 서 있으면서, 전문적인 이론을 들먹이며 관념적인 수사(修辭)를 펼치는 모습으로 비쳐지곤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지식인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존경받고 본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인'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인물들의 행태는 과연 수많은 대중들에 의해 존경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또한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이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하기로 하자.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인가. 절제된 생활과 도덕적 성품, 그리고 후학(後學)들에게 모범이 될만한 언행 등등…. 이러한 요인들은 지식인이라면 갖춰야할 덕목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처럼 개인적인 품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진정 이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인가?
지식인이 사회 속에서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지식인의 올바른 자세는 이러한 개인적인 품성을 논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가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면, 공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반드시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개인적인 요인 이외에도, 지식인이라면 보다 넓게 생각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녀야만 한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가 막중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이론과 실천을 병행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인 홍세화를 진정한 지식인의 반열에 세우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오랜 동안 타의에 의해 망명 생활을 했던 홍세화가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란 책을 통해서 이다.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한국 사회의 요모조모를 세세히 조망하고 있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나는 내가 미처 알고 있지 못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세 번째 저서인 이 책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중세성'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부문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습속'을 용인하는 나의 무관심과 나태를 다시 한번 질책하였다.
늘 현실의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의 글을 신문 속에서 찾아 읽는 것은 내가 누릴 수 있는 하나의 기쁨이다. 이처럼 책을 통해서 한동안 그의 생각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내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서문과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서문은 23년 간의 이방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으로 '귀향'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어쩌면 '떠나 있으면서 떠나지 않았던' 이 기간 동안 그는 '고국'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키워왔을 것이다. 특히 이국에서 겪은 택시 운전사의 눈을 통해서 더더욱 한국 사회의 모순을 바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1부는 '쎄느강에서 한강까지'라는 제목으로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와 비합리적인 측면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의 학자인 부르디외의 '국가귀족'이란 표현을 빌어서 만든 '사회귀족'이라는 단어는 한국의 부도덕한 이른바 '사회지도층'을 가장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2002년에 총리 청문회에서, 총리 후보자들이 보여주었던 일부 '사회지도층'의 행태는 실상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극우적 색채를 분명히 하고 있는 족벌언론과 지식인들의 기묘한 '동거'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2부에서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로 옮겨간다. 저자는 여기에서 지식인들조차 합리적인 면보다 '힘의 논리'에 경도되어 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에 무감각하기만 한 지식인들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한국의 지식인에게'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아마도 프랑스에 있을 때 집필한 듯한 3부의 '빠리 통신'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진정한 연대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신문사에 재직하고 있는 그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사회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법관들의 '판사조합'까지도 용인하는 프랑스 사회의 '합리성'에 대한 일말의 부러움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진정한 보수 우익이 없다'는 글로 시작하는 4부는 '한국 사회의 진보를 찾아서' 다양한 탐색을 하고 있다. 최근 몇 차례의 선거에서 볼 수 있듯이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에 대한 지지가 과거에 비하면 주목할 정도로 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약하기만 한 한국 의 진보세력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관념과 의식 속에서만 당원으로 활동하는 진보정당의 현실을 지적하고, 진정한 진보란 사회의 소수자 입장에서 그들과 진심으로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5부는 '희망 찾기'라는 제목으로, 이 사회에서 '더불어 살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저자가 생활에서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면모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과 교육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진정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앵똘레랑스)까지도 '똘레랑스(관용)'을 내세우는 것은 진정한 '똘레랑스'의 정신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자가 힘주어 말하고 있듯이, '몰상식과 불의로 가득한 사회를 창조적이며 자유로운 구성원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가꾸기 위한 투쟁'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인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역할을 하고 있는 저자가 왜 스스로 '악역'이라고 칭하고 있는가. 앞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제 역할에 충실치 않은 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원칙과 상식, 그리고 합리적인 것을 따르기보다 때로는 현실적인 권력과 힘의 논리를 재생산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지식인'들을 우리 주변에서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근래 들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툭하면 '색깔론'과 '지역감정'을 앞세워 자신과 다른 의견을 묵살하는 풍토 역시 여전히 사회 일각에서 통용되곤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저자가 자신의 역할을 가리켜 '악역'이라 칭하며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닌지.
덧붙이는 글 |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홍세화, 한겨레신문사, 2002)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한겨레출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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