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설날 새배로 마음빚 갚다

등록 2003.02.07 18:56수정 2003.02.07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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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 어머님을 뵈었습니다. 모로 누워 계시던 어머니는 난데없이 나타난 막내아들이 믿기지 않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내 팔을 붙들고 내 얼굴을 몇 차례 뜯어보신 후에야 나를 알아봤습니다. 헤프게 벌려진 입으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굴러 내렸습니다.


'이기 누고...?'
'희시기 아이가...?'


만사 제쳐두고 서울 길을 나선 결과입니다. 설날 내내 여든이 훨씬 넘으신 노모가 거실 문을 열어두고 막내아들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음식도 드시지 않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면 어느 자식인들 시골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밤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밤을 꼴딱 샜습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 게 맞습니다. 나는 졸다 자다 건성으로 대꾸하는 편이었고 어머니는 수 십 년을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처음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둘째형이 내 돈 12만원을 빌려가서 아직 까지 안 갚고 있다는 사실도 들추어냈습니다. 20년이 훨씬 지난 일인가본데 나는 도무지 기억이 안 났습니다.

신기한 것은 귀가 멀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고함을 지르다시피 해야 겨우 알아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내가 하는 얘기는 평상적인 목소리로 해도 입 모양을 보고 아는지 어쩌는지 너무도 잘 알아듣는 것이었습니다. 환갑이 다 되어 가는 큰 형수가 신기해 죽겠다는 듯이 자꾸 나더러 말을 시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도 다른 사람이 말을 하면 못 알아들으니 한편으로 신기 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가슴이 저렸습니다.

어머니 방에서 곁에 누우니 금새 잠이 몰려왔지만 내 손을 거머쥐다시피 하여 쓰다 듬고 쓰다듬고 하는 통에 잠이 오다가 도망가고 오다가 도망가고 했습니다. 응. 응. 건성으로 대꾸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내가 잠이 깬 것은 새벽녘 인기척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일어나 윗목에 있는 휴대용 변기에 소변을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처럼 앉은 채로 몸을 밀고 다니셔야 하는지라 화장실 변기에는 올라가지를 못하는 실정입니다. 소변을 다 보시기를 기다렸다가 살그머니 일어나서 변기를 내 갈려고 하니까 처음에는 변기를 안 보이려고 완강하게 거부하시다가 내게 넘겨주셨습니다.


화장실에 가져가서 소변을 비우고 백태가 끼어 있는 변기 구석구석을 솔로 씻었습니다. 나중에는 맨손으로 새하얀 사기변기가 반짝반짝 할 때까지 꼼꼼하게 닦았습니다. 변기 겉에 묻은 물기를 마른 걸레로 닦으면서 내가 변기를 닦는 게 아니라 쓰다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문득 떠 오른 기억이 있었습니다.

내가 한때 온 몸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서 친구들에게 떠 매어서 집에 돌아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잉크를 부은 듯이 새까맣게 허벅지랑 허리랑 등짝이랑... 고문을 견디다견디다 타버린 살덩어리를 어머니는 어떻게 매만졌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옷을 다 벗겨놓고 계란을 굴리기도 하고 수건으로 더운물 찜질도 하고 안티푸라민도 발라 맛사지도 하고 약도 사 멕이고 몇 주를 그렇게 지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제는 그랬습니다. 매년 설날이건 추석이건 꼬박꼬박 서울 큰형님 집에 갔었지만 그때하고 전혀 딴판으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롯하게 어머님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평소의 명절에는 꿈도 못 꿀 행운이었습니다.

또 획기적으로 달랐던 것이 있습니다.

세배를 드렸더니 와... 자그만치 세뱃돈을 5만원이나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설 때 세배를 드리면 어머니는 늘 단돈 천원을 세뱃돈으로 주셨었는데 5만원이나 세뱃돈을 받고 보니 정말 횡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번 설 때 어머님이 아들, 며느리 그리고 장성한 손자들에게서 상당한 규모로 수금이 되셨던 모양입니다. 어머니가 아주아주 부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노부모나 조부모가 계시는 분들은 설 한 주 쯤 지난 후에 고기근이나 사 들고 가서 다시 새배 드려 보세요. 제가 장담합니다. 로또 복권의 허황된 꿈보다 훨씬 실속 있는 장사(!)가 될 것입니다.

어머님 지갑을 엿보니 만원짜리가 가득 하였던 것입니다. 딴 데 또 줄 데가 많아서 더 못주니 그리 알라고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게 보였습니다. 돈이 저렇게 말을 하는구나 싶으니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내 평생 한 번 절하고 세뱃돈 5만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새벽 일찍 떠나오는 제게 어머니는 당신이 드시던 박하사탕을 봉지 째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고속버스에서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벼룩도 낯짝이 있지 박하사탕 봉지만큼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뒤늦은 서울 세뱃길에서 가장 난감했던 것은 어머니가 나를 따라 나서서 시골 땅 고향마을에 가고 싶다고 우기시는 것이었습니다. 겨우겨우 말렸습니다. 나중에 내가 차를 가져 올 때 꼭 모시고 가겠다고 했더니 미덥지 않는지 아니면 더 떼를 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셔서 그런지 또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언제 올끼고?"
"니가 또 오긴 올끼가?"


자꾸자꾸 다짐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에도 곧 들어온다고 하고는 몇 년씩 사라지곤 하던 아들이었던 것이 기억 난 것이었을까요?

어쨌든 정말 잘 다녀왔다 싶었네요. 조만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와야겠습니다. 불쑥 감행 한 서울 나들이가 수지도 맞고 보람도 많았네요. 아쉽기만 한 긴 밤 짧은 이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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