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음식은 추억보다 맛나다
오곡밥에 말린나물 한상 가득 차려봐요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7>오곡밥과 온갖 나물

등록 2003.02.09 17:58수정 2003.02.09 18:2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잊고 지내던 ‘작은 설’ 정월 대보름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설 지내기도 힘들었는데 웬 또 그런 것까지 찾아 먹느냐 하면 딱히 뭐라 답할 길이 없다. 하지만 작은 설을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 하여 가족끼리 단출하게 어울릴 기회를 갖는다는 긍정적 측면에서 보면 괜찮은 꺼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어렸을 적을 기억할 때 남성들은 불깡통 돌리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어머니와 여성들이 묵묵히 애쓰는 과정을 잊고 지내기 쉽다. 올해는 아이들에게 보름 음식 장만을 부부가 같이 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떨까? 음식을 먹으면서 불깡통 돌리던 추억의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어주자.

아래 소개하는 음식은 어렸을 적 어머니께서 주로 해주시던 방식이라 요즘 우리가 다 흉내내기는 힘겹다. 작년 여동생 생일을 근사하게 차린답시고 따라하다 허리가 휘는 줄 알았다. 그래도 몇 가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설 떡국에, 추석 송편을 기본으로 양대 명절 때의 음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엇비슷해지니 별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정작 오곡밥과 나물류가 중심이 되는 정월 대보름 음식을 만들려고 하면 겁부터 나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생나물이 아닌 마르고 묵은 나물이라니?

일단 오곡밥을 짓는 오곡이 뭔지 모르겠다. 다섯 가지 곡식인 찹쌀, 팥, 조, 수수, 기장은 들어는 봤지만 찹쌀과 팥은 알아도 조, 수수, 기장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시장에 가면 다 챙겨주는 품목이기는 하나 그 작은 알맹이들을 집에 가져와서 씻는다는 게 겁 난다.

찹쌀과 여러 잡곡은 담가서 불렸다가 씻어두고 팥은 미리 푹 삶아 건져 물기를 빼서 물러 터지지 않게 식혀서 밥물에 배지 않게 두면 밥 준비는 대체로 됐다. 굵은 소금만 곁들이면 된다. '오곡(五穀)밥'은 솥에 넣고 직접 삶고 끓이는 밥이 아니다.


시루에 앉히고 오곡을 골고루 섞어 가마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간간하게 소금간을 하고 시루 바닥 구멍에 무를 썰어 막는다. 다음 시루와 솥 사이를 밀가루를 되게 개어 김이 새나가지 않게 단속을 철저히 하여 서서히 찐다. 센 불로 끓이다가 불을 줄여나가면서 찌다 건조한 수증기가 나오거든 오곡밥 익는 줄 알면 된다. 고루 밥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는 두어 번 아래 위를 섞어줄 필요가 있다. 밥을 했다고 음식마련이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찬 만드는 게 태산같이 쌓여 있다.

말린 나물은 대체로 겨울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C와 제철에 나지 않는 남새의 섬유질을 보충하기 위해 안성맞춤이다. 또한 차고 넘치는 음기를 다스리기 위해 한여름 햇볕을 가득 머금은 작물을 정성으로 말려 보관한다. 예전 우리 어머니들은 가을까지만 먹고 일년 다 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준비함으로써 지혜를 발휘하셨다.

호박고지를 가을 찬이슬이 내릴 때 바위나 평상에 꼬들꼬들하게 널어 마련한 것을 봉지에 잘 싸뒀다가 찬물에 느긋이 불렸다가 쌀뜨물과 들깨를 간 국물에 자작하게 볶듯이 끓여내면 쌉싸름한 맛이 일품이다. 차게 뒀다 먹으면 더 맛있다.


말린 취나물과 아주까리 잎은 불린 뒤 간장으로 간을 하여 데쳐내고, 고사리는 실고추로 때깔을 내고, 무청말림에 된장을 조금 풀어 익히고, 도라지, 다래잎 볶고 무치면 된다.

새파란 봄동과 시금치를 살짝 데쳐 녹색을 살려주고, 무채 따로 두껍게 썰고 토란대를 쌀뜨물에 다시마, 멸치 국물 얹으면 또 하나 걸작이 탄생이다.

무말랭이, 화살나무잎, 다래잎, 가지말림, 풋고추절임에 깻잎장아찌, 콩잎장아찌, 오이장아찌, 꺼내놓고 무코다리찜 푸짐하게 장만하니 상다리 휘어지겠다.

토란잎은 조선간장으로 간을 하여 푹 쪄 내놓으면 알싸한 것이 쌈거리로 최고인데 씹는 폼이 볼만하며 오랜만에 아귀가 화들짝 놀란다. 마저 들깨 갈아 토종닭을 간장으로 간하고 갖은 양념과 참기름을 둘러 볶아 토란국 끓이고, 조기 서너 마리 적사에 구워냈으니 오늘 입맛 땡기는 날이다.

여기에 무채를 얇게 썰어 시원한 냉수를 붓고, 참깨 듬뿍 치고 고추가루 풀고, 김 구워 손으로 비벼 빻아 넣고 시큼하게 식초 한방을 떨어뜨린 ‘무냉채’ 한 그릇 퍼 올리면 보기도 좋고 맛도 그지 없다. 찰진 오곡찰밥이 입안에 달라 붙을 염려도 없다.

불놀이 나간 사이 밥이 다 되면 온 동네는 오곡밥 내음이 진동하였다. 한번은 청년들이 시루 째 들고 가 냠냠해버리는 바람에 대단한 소동이 일어났다. 흰밥도 없으니 기가 찰 노릇이이었다. 아버지는 동네방네 고래고래 소릴 질러 보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놈들이 진수성찬 말린 나물로 걸게 차린 반찬은 남겨 뒀으니 다행이다. 맵밥을 새로 지어먹었다.

며칠 째 진행되었던 철룽과 마을어귀 당산에는 제를 지내느라 환하게 촛불이 켜져 있다. 집집마다 음식장만이 끝나면 정성껏 제를 지내고 어른들은 귀밝이술을 한 잔씩 하셨다. 아버지 옛이야기는 밤새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잔소리로만 들리던 당신의 그 길고 긴 기분 좋은 일장 연설을 이젠 들을 수 없다.

밤새 배불리 먹고 자고 나서 "영숙아!" "철수야!"하고 불러 “응”하고 대답하면, "내 더위, 네 더위"하며 얼른 더위를 팔아버리고는 도망오곤 했다.

언제부턴가 도시생활로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하게 되면서 살얼음이 언 음식을 먹어 볼 수 없어 이한치한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과학의 이기가 낳은 결과인 것을 어찌하랴? 이런들 저런들 정월 대보름 음식은 추억보다 맛나다.

덧붙이는 글 | 마침 대보름이 이번주라 둘째 솔강이 돌잔치를 집에서 조촐히 차려 가족끼리만 모이기로 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반찬을 해내려면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모레 쯤 시장을 보러 갈 계획이지요. 한 번 맛있게 해 먹으면서 가족들 입맛도 살려주고 조금 힘든 것 정도는 이겨낼 생각입니다. 혹 드셔보시려거든 일주일 후 점심에 제 집으로 놀러 오세요.

덧붙이는 글 마침 대보름이 이번주라 둘째 솔강이 돌잔치를 집에서 조촐히 차려 가족끼리만 모이기로 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반찬을 해내려면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모레 쯤 시장을 보러 갈 계획이지요. 한 번 맛있게 해 먹으면서 가족들 입맛도 살려주고 조금 힘든 것 정도는 이겨낼 생각입니다. 혹 드셔보시려거든 일주일 후 점심에 제 집으로 놀러 오세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