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우리들이 도깨비처럼 보이냐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49> 뺑돌이와 뺑순이

등록 2003.02.10 16:29수정 2003.02.1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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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을 바라보면 뺑덕이와 뺑순이가 생각난다
초가집을 바라보면 뺑덕이와 뺑순이가 생각난다경주시
"뺑돌아, 아바이 이 닦게 왕소금 좀 주라."
"아부지 왕소금이 다 떨어졌뿟다. 인자 우짤끼고?"
"뺑순아 퍼뜩 도랑에 가서 왕모래 한주먹 쥐고 와."


우리 마을에는 이북에 고향을 둔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한 분 살았다. 그 아저씨가 사는 집은 똥뫼산(동산) 끝자락에 있었다. 마을에서 홀로 떨어진 그 집은 우리 마을에서는 흉가로 소문난 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집은 쌀밭 등으로 올라가는 우리 마을 끝자락에서도 마치 웅덩이처럼 움푹 패인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마을의 집들은 모두 들판처럼 평평한 들 마당에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집은 희한하게도 싸릿대문만 골목길에 붙어있었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싸릿대문이 닫힌 그 집안을 살펴보려면 우리가 발돋움을 해도 쥐 빛 초가지붕만 덩그러니 보였다.

"하여간 독하기도 하제?"
"와?"
"귀신이 붙은 저 집에서 사는 거 보모 이북 사람들이 독하기는 독한 모양인갑다"
"아, 이사 온지 며칠 됐다꼬. 아직은 잘 모를 수밖에 없지. 멀쩡한 넘이 시름시름 앓거나 하룻밤새 누가 죽어뿌모 그때서야 알겄제"
"쉬이, 들을라"

뺑덕이와 뺑순이네 집이 흉가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은 그 이북 아저씨가 이사를 오기 전부터였다. 그 집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살았다 하면 흉흉한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병이 들거나 아니면 하룻밤 새 까닭없이 죽는 것이었다. 또 그 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집사람들이 바깥에 나갔다가 큰 사고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한 때 우리 마을에서는 그 집을 아예 태워 없애버리자는 의견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나왔을 뿐 아무도 그 집에 불을 지르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이북 아저씨가 이사를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그 집 앞을 지나가는 것조차 두려웠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그 집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흉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집은 온통 쥐 빛뿐이었다. 움푹 꺼진 쥐 빛 초가지붕 위에는 수북하게 자란 풀들이 쥐 빛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또 쥐 빛 지붕 처마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동그란 쥐 빛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었다. 굳게 닫힌 싸릿대문은 썩을대로 썩어 바람이 불면 먼지가 풀썩풀썩 일었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도깨비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그 집에 그 이북 아저씨가 이사를 온 것이었다. 이북 아저씨에게는 아들과 딸이 하나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명덕이었고, 딸의 이름은 명순이였다.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누구나 명덕이와 명순이를 뺑덕이와 뺑순이로 불렀다.


평안도 어디가 고향이라는 그 이북 아저씨는 말투 또한 특이했다. 뺑덕이와 뺑순이도 아버지의 영향을 입어서인지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도 말끝이 이북 아저씨처럼 조금 높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심심하면 그 이북 아저씨의 말투를 흉내내며 배를 잡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뺑돌아, 뺑순아 아부지 이 닦게 왕모래하고 구정물 좀 가져와"

당시 뺑돌이와 뺑순이는 우리 또래였다. 하지만 아무도 뺑돌이와 뺑순이와는 같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이 흉가에 산다는 그런 섬뜩함도 있었지만 우리들이 뺑덕이와 뺑순이와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좀처럼 집밖으로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뺑돌이와 뺑순이가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 이북 아저씨는 이른 새벽마다 리어카에 무언가를 잔뜩 싣고 어디론가로 나갔다가 어스럼이 질 무렵이면 그 리어카를 끌고 긴 그림자를 끌며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 마을로 곧장 들어오지 않고 똥뫼산을 돌아 그 집으로 사라지곤 했다.

"이기 무슨 냄새고?"
"엿냄새 아이가"
"근데 이기 오데서 나는 냄새고?"

뺑덕이와 뺑순이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엿장수였다. 뺑덕이와 뺑돌이가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도 이북 아저씨가 엿을 팔고 모은 여러 가지 고물을 가리는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뺑덕이와 뺑순이는 고물 가리기가 끝나기 무섭게 이북 아저씨가 밤새 엿을 만들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 어느날 이른 새벽, 그 집에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이내 이북 아저씨가 흰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끌려 나왔다. 뺑덕이와 뺑순이의 손에도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은 이내 이북 아저씨와 뺑덕이 뺑순이를 트럭에 싣고 신작로에 먼지를 보얗게 날리며 사라졌다.

"저기 우짠 일고?"
"무시라, 저 사람들이 그 무시무시한 뺄갱이란다, 뺄갱이"
"체~ 말도 안되는 소리. 누가 헤꼬질 한다고 신고를 했것지. 이북 사람은 모두 뺄갱이라꼬 누가 카더노"
"아, 그래도 이남에 와서 묵고 살아볼라꼬 그 무시무시한 흉가에까지 들어가서 그리도 바둥거리며 사는 사람을 보고 와 저라노. 정말 해도 너무 한다카이"

그랬다. 이북 아저씨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뺑덕이와 뺑순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북 아저씨는 이북 말을 쓰면서 이른 새벽에 리어카에 무언가를 가득 싣고 다녔다. 그런 이북 아저씨를 보고 누군가 이상하게 여겨 군부대에 신고를 했던 것이었다. 또한 엿장수를 핑계로 이곳 저곳의 사정을 알아내 밤마다 무전기로 북한에 알렸다는 것이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당시 내가 생각해 보아도 구레나룻이 멋진 그 이북 아저씨가 결코 간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 이북 아저씨의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연을 만들기 위해 그 이북 아저씨가 사는 집 앞의 대나무 밭에서 서성거릴 때였다.

"대나무 하나 베어주랴?"
"......"
"너도 우리들이 무슨 뺄갱이처럼 보이냐?"
"아~ 아니요"

이북 아저씨는 이내 잘 뻗은 대나무 하나를 베어내 낫으로 잔가지를 모두 쳐내고 톱으로 적당한 크기로 토막까지 내 주셨다. 그리고 토막 난 대나무를 내게 주며 방긋이 웃었다. 이만하면 올 겨울 내내 연을 만들어도 될 거라면서. 그리고 우리 뺑덕이와 뺑순이와도 동무하며 잘 친해라는 말을 하면서.

그날, 그렇게 끌려간 이북 아저씨는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 이북 아저씨의 말처럼 뺑덕이와 뺑순이와는 동무하면서 친해볼 겨를도 없이. 나는 영원히 그 이북 아저씨와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군복을 물들여 입은 그 이북 아저씨의 멋진 구레나룻과 철모 바가지에 왕소금을 담아 들고 서있던 뺑덕이와 뺑순이의 시커먼 그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다.

"뺑덕아, 뺑순아 아바이 이 닦게 왕소금하고 물 좀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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