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 동무들과 함께 깨물던 부럼

어렵던 시절 친구들의 생생한 모습

등록 2003.02.13 23:00수정 2003.02.1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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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럼
부럼김규환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이들은 48명이었다. 그 많던 숫자가 졸업할 땐 32명으로 줄었다. 우린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언제나 한 반이었다. 열 살 때 입학한 육남이라는 친구와 아홉 살 때 입학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친구, 일곱 살 두 명에, 여섯 살짜리도 한 명이었다. 그래도 대다수는 여덟 살 때 들어온 아이들이다. 네 살 차이어도 그냥 “누구누구야!” 하고 불렀다. 3-40호 되는 세 마을에 열 가구 남짓 두 마을에서 오는 친구치고 꽤 많은 편이었다.


우린 코를 질질 흘리며 입학식을 거나하게 치르고 한 학기가 지날 때까지 마을 아이들간에 티격태격 세 싸움을 시작했다. 숫자가 제일 많고 덩치 큰 아이들이 한 둘 더 많아 다른 마을 아이들을 평정하고 나니 문제될 일없이 죽 지내왔다. 이 아이들은 입학식 이후 6년 동안 한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께 배웠다.

그러다 보니 누가 교실에서‘응가’를 했는지, 손버릇은 어떤지, 공부는 못해도 머리 돌아가는 건 누가 잘 하는지, 누구 집은 몇 마지기 논농사에 소는 몇 마리고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소상히 파악하고도 남았다. 몇 번 그 마을에 놀러 갔다 와 보면 숟가락 숫자까지 죽 꿰고 있는 게 당연하다.

걔 중 1-2학년 때 다른 학년 선생님의 쌍둥이 아들이었던 치용이, 정용이는 도시 물을 먹어선지 얼굴이 뽀얗고 살이 포동포동 보기 좋게 쪄서 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얼마 안가 그 아이들도 아버지를 따라 다른 학교로 갔다.

다들 고향 마을을 떠나기만 하더니 5학년 때 전학 온 현희라는 여학생은 남자아이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그 아이를 통해 사춘기를 겪을 만치 소나기에 나온 소녀 같지는 않았어도 설렘을 주었다. 사춘기 남자아이들은 서로 옆에 앉아 보려고 애썼고 그 아이 얘기 꺼내고 관심 끌 행동을 하느라 바빴다. 연서 아닌 낙서를 써서 뿌려대는 아이들은 선생님께 꾸지람 듣기 일쑤였다.

이 세 아이 빼고 우린 정말 산골·시골·벽지 촌놈들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엔 동무들 몰골이 왜 그랬을까? 찬찬히 하나하나 되짚어 보자. 아이들 행색은 남루하다 못해 다들 거지에 가깝다. 물론 나에게도 해당된다.


얼굴은 까무잡잡하기 이를 데 없어 ‘땔 나무꾼 저리 가라’다. 여름에 잠시 조금 반짝 할 뿐 가을 찬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락을 베고 나서 2모작으로 쌀보리를 가느라 논고랑 흙더미를 괭이로 몇 일 두들겨 패고 나면 영락없이 시궁창에 들어갔다 나온 아이들, 부모 없는 자식으로 변해 갔다.

손은 부르트다 못해 거북 등이나 오래된 소나무 껍질처럼 갈라졌다. 얼마나 갈라졌는가 하면 조금만 겹쳐지고 주름진 곳이라면 어김없이 짝짝 벌어져 골이 진 곳에 빨간 피가 선명하게 잡혔다. 막 화학비누가 도입되던 때라 비눗물이라도 손 틈에 한 번 들어가는 날이면 그 쓰라림을 견디기 힘들다. 한 번 그렇게 된 이상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는 힘들다. 다음 여름이 되어서야 원상복구 된다.


땅콩
땅콩김규환
그런데도 유독 두 아이는 여름이 되어도 그 때를 벗지 못하고 산다. A라는 남자 친구와 B라는 여자친구다. A나 B나 공부는 잘했다. 둘 다 가난하기론 나보다 더했던 그들은 얼굴도 마치 흑인소년소녀 가장처럼 ‘부르터스’ 였다. 그 때 생각난 것이 ‘저러다 두 친구 정말 영원히 얼굴 피부가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할 정도였으니 그 심각함은 대단했다.

여기에 방학이면 겨우내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산에 가서 ‘물거리’(생나무로 물기가 전혀 빠지지 않은 대단히 무거운 잎 하나 붙지 않은 활엽수 가지를 모은 나무)를 하느라 ‘청미래덩굴’, ‘찬바람가시’, 찔레와 실랑이를 해야 하는 아이들은 더 고역이었다. 그렇다고 어른들께 “나, 일 못해라우~” 했다가는 그 날 밥 먹기는 글렀거나 집안에서 쫓겨나기 쉬운지라 두 말 않고 노동에 동참해야 했다.

일을 마치고는 갈라진 손을 제아무리 아침저녁으로 쇠죽 쑤던 솥단지에 양재기 대야를 넣어 물을 덮여 ‘따순물’에 지푸라기를 오무려 손을 씻고 ‘콜드크림’을 발라줘도 소용없었다.

발도 학대받는 건 마찬가지다. 미끈미끈한 나일론 양말에 다 헤진 운동화나 고무신을 닳고, 닳을 때까지 신고 다녀 발가락이 다 드러남에 따라 양말이 온전할 리 없다. 딱딱하게 굳은 살이 나무 등걸에 찢겨 헝겊을 대고 신발을 꿰매는 경우가 허다했다. 두껍기는 하지만 보온이라곤 아무짝에 도움 안 되는 나일론 양말은 사람 몸과 따로 놀기 때문에 몇 걸음 옮기면 벗겨지고 만다. 산에 가서 밑창이 떨어지거나 나무‘끌텅’에 찢기는 날이면 갖고 갔던 새끼줄이나 칡넝쿨을 떠서 칭칭 감고 그 먼 산길을 내려와야 했으니 오죽했겠는가?

머리를 보면 더 가관이다.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까치집인지 쥐새끼 집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머리 감은 지는 한 달이 다 된 듯 하다. 비듬 하얗게 끼어 있으면 양반 축에 든다. 푹 눌러 쓴 빵모자 덕에 감지 않은 기름기와 어울려 철석 달라붙어 있다. 비듬은 의례 있는 걸로 치고 우리 동무들의 머리에 기생하는 친구들 덕에 골칫거리다.

머리를 살짝 들추면 서까래가 하얗게 알을 까놓고 본격 부화를 꿈꾼다. 대로 만든 올 고운 ‘참빗’으로 제 아무리 빗고 빗어봐도 서까래 씨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며칠만 방치했다가는 온몸에 ‘이’라는 흡혈귀가 드글드글 끓어댄다.

이 때는 집안에서 체면이고 뭐고 없이 잿빛 내복을 벗고 호롱불 앞으로 다가가서는 이 잡기에 몰두해야 한다. 이놈 이는 그늘과 밤에는 얼마나 날쌘지 주위에 있던 이불을 멀찌감치 밀쳐 놔야 한다. 언제 그리 옮겨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보리쌀만큼 큰 것이 있는데 이놈 한마리 잡아 손톱으로 “쿡” 눌러주면 “툭-!’하고 터져 빨아먹었던 까만 피를 흘리고 뒈져 버린다.

먼저 수십마리 이를 잡고 나서 내복 바느질 땀을 따라 덕지덕지 서까래를 호롱불에 태우면 “타닥, 탁”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검게 탄다. 한꺼번에 수 백 마리를 제거 할 수 있다. 이렇게 한다 손치더라도 다 없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한두 마리 남거나 집안에, 또는 친구들 한 명에만 있어도 교실 전체로, 온 동네로 퍼지는 게 ‘이’였다.

한편, 이 잡기 위해 골마리를 까고 와 웃통을 벗어 던지면 제일 먼저 묵은 쌀에 검붉은 집게벌레 같은 좁쌀 만한 것이 후다닥 튀어 어디론지 사라진다. 툭툭 튀는 솜씨가 메뚜기는 상대도 안된다. 이 놈은‘벼룩’이라는 놈이다. 벼룩이 한 번 튀었다 하면 방 구석구석을 튀어 다니다가 어딘지 모르게 숨는 통에 초반에 튈 것을 예상하고 덤비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다.

이러니 맹독성 ‘이’ 약은 집안 상비품이었다. 볼그스름하고 투명한 맑은 물약으로 자그마한 병에 들어 있는 그 약을 어른들이 5일 장에 가시면 잊지 않고 사와야 했다.

호두
호두김규환
또한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남자아이들은 머리에 100% 부스럼을 안고 살았다. 머리를 감지 않아 불결한 탓도 있거니와 영양부족으로 쉬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유도 한 몫 거들었다. 그 야릇한 노란 고름 냄새를 풍기며 자꾸만 번져가는 부스럼은 정말 골칫거리였다.

부스럼이 생기면 고름을 짜내고 소독을 반복하지만 딱쟁이를 자꾸 손으로 뜯곤 하는데 한 번 잘못 건드렸다가는 머리카락이 같이 뽑혀 나오고 피가 질질 흘러나왔다. 어쩌다 머리 한 번 깎으러 갔다가 이발기계‘바리깡’이 머리카락을 한 번 씹는 날에는 사타구니를 발에 걷어차인 만큼 아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서울 충정로에 사는 이명래(대학 와서 데모하다 쫓기다 잘못든 길에 보니 ‘이명래 고약’이라는 간판을 종근당 뒤쪽 미동초등학교 부근에서 본 기억이 난다.) 씨 덕에 더는 곪지 않고 머리에 이 정도만 흉이 남아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옷은 단추가 한두 개는 꼭 떨어져 있고 무릎 주위와 발꿈치에는 엄마 몸뻬나 헤진 형의 옷 헝겊 조각 속감을 대고 홀매쳐 기운 자국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다른 색 속감만 눈에 띄면 봐 줄만 하니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실 마저 다른 색이니 볼수록 가관이다. 동무들이 입었던 옷은 대개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 상하 맞춤 츄리닝이기 일쑤다.

저학년 시절은 보자기가 책가방을 대신 했으니 배꼽을 내놓고 추운 줄도 모르던 철부지 코흘리개들의 필통 흔들어 대며 달리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목욕탕을 간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은 터라 솥단지 가득 물을 끓여 미리 길러둔 찬물을 섞어 정지문을 꼭 걸어 잠그고 큰 통에 들어가 적당한 온도로 목욕을 했으나 설 쇠기 전이나 봄방학 중에 한 번 하는 게 고작이었다. 용의 검사 때는 군대 규율과 다를 바 없었으니 아이들마다 겁먹기 일쑤였는데 ‘용의 검사’ 라는 말만 나와도 미리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지만 2-2일 지내고 나면 그전과 다름이 없었으니 무슨 방도를 찾아야 했다.

남자아이들끼리 모여 얼음이 갓 녹은 2월 말에 냇가에 풍덩 들어가서 씻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마을 아이들 예일곱 명이 뿜어내는 김이 모락모락 밤 하늘에 피어 올랐다. 한 시간 가까이 찬물에 몸을 담그고 어느 정도 몸이 불었다 싶으면 무릎, 팔뒷꿈치, 손등, 발바닥과 목 때를 벗겨나갔다. 수세미도 없었던 터라 맨들맨들한 돌멩이를 주워 때를 벗겨댔으니 오래 문지른 곳은 살갗이 헐어 피가 나는 수도 있었다. 어른들은 우리보다 더했겠지만 하여튼 우리도 없는 동네에서 어렵게 잘 벼텼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야기 할 때다. 그 코흘리개들은 다 어디 있을까? 겨우내 김치에 ‘싸래기죽’(방아 찧을 때 정미소 기계가 구닥다리거나 벼가 비에 젖어 덜 말랐을 때 좁쌀 만한 크기의 부스러기 쌀이 많았는데 그걸로 흰 죽을 쒀 겨울철 절반은 채웠다), 싱건지, 고구마와 무밥으로 허기를 채웠어도 아직 다들 건강하다. 최근 몇 해 얼굴을 못보고 지낸 아이들이 생각난다. 명절 때라도 한 번 보고 올 걸 그랬다.

그 때도 부럼을 깨물었는데 합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겨울 끝자락 턱없이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땅콩, 생밤, 호두, 가래 열매 따위를 섭취해 봄철에 대비하고자 했던 때문이다. 아버님이 콩을 좋아하셨기에 이 때면 한 말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먹었던 생각이 난다. 견과류의 풍부한 영양을 이때나마 먹어 이를 튼튼히 하는 것은 물론 부스럼을 없애는 노릇을 톡톡히 해냈던 데서 비롯되었으리라.

대보름 이틀 전 부럼을 깨물면서 어릴 적 동무들 옛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가까운 시장에 가면 땅콩 1되 1,000원(북한산), 밤 1되 4,000원(국산), 호두 1되 4,000원(북한산) 이면 살 수 있으니 부럼도 깨물 겸 코흘리개 동무들 생각도 한 번 떠올려 봐도 괜찮을 성 싶다.

생밤
생밤김규환

덧붙이는 글 | 친구들아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

덧붙이는 글 친구들아 연락 못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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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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