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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대학살로 큰 형을 잃은 저희 아버지(김형필, 1935년생)가 저에게 사실을 잊지말라며 1997년 구정설에 전해준 간략한 증언록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직에 종사하고 정년퇴직한 이후 지금 현재(2003년 2월) 고향(경남 진양군)에서 과수일을 하고 계십니다. 세월이 50여 년이나 이미 흘렀고, 공무원직을 오래 수행한 탓으로 격정적인 증언이 아닌 나름대로의 자료조사에 기초한 증언입니다.
사실 증언록을 받았을 당시 딱딱한 성격의 아버지가 언제 이러한 증언록을 작성했는지 아들인 저로서도 다소 의외였습니다. 보도연맹의 또다른 유족이었던 어머니만이 항상 보도연맹원 대학살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눈물흘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아버지의 형인 저의 큰아버지 역시 보도연맹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나아가 형의 학생운동을 만류하며 친정부·친체제적인 경찰직을 수행하는 것이 못내 거북스러웠던 저로서는, 아버지가 그러한 불행했던 과거사를 이전에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기에 그 증언록을 받은 일은 이전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일시에 소거시켜버릴 정도로 강렬한 ‘사건’이었습니다.
보도연맹이란 용어 자체가 망각되어져 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그래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관점과 상세화의 측면에서 미숙하지만, 제 아버지의 증언 글을 기꺼이 원문 그대로 올리며, 앞으로 이 문제의 보다 폭넓은 공론화와 학술적 연구가 지속될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가해자에 대한 법적·역사적 책임을 물음과 동시에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분명하고도 정당한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본문 그대로(오자라도 문맥이 통할 경우 그대로 두었습니다)
보도연맹사건(保導聯盟事件)
6.25전쟁 직후인 1950.7.25.전후를 기해 보련가입된 사람들을 이념으로 규정 당시 전국적으로 수십만 사람들을 은밀히 학살한 사건임.
주로 농촌 농민들이 대부분이었음.
① 동기
우리나라가 과거 36년간 왜놈인 일본국에 식민지로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대동아전쟁)에 미소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항복하고 1945.8.15. 해방이 되면서부터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북한에는 쏘련군(러시아)이 주둔하여 1948.5.10 초대 국회의원(제헌국회) 선거때까지 군정으로 있었다. 군정으로 있던 4~5년 동안 무정부상태에서 공산주의가 되면 좋으니 민주주의가 되면 좋으니하고 동리 주민들을 부추기며 정치에 대해 운동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농촌에서는 왜정때부터 농사밖에 다른 생각이 없던 농민들이 왜정말기 농사를 지어도 왜놈의 학정과 착취 공출로 다 뺏아가고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놋그릇 숟가락까지 빼앗기고 또한 동리에는 고리채를 하고 세도를 부리면서 밥도 못먹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군림하는 대지주들이 더욱 세를 부리던 때였다.
군정 과도 말기에 앞으로 공산주의 정부가 되면 소유농토가 없어도 부자들의 농토를 공동으로 농사짓고 일만 열심히 하면 빈부의 차이 없이 배부르게 밥도먹고 잘 살아갈 수 있으니 공산주의 정부가 되는 것이 좋으니 지지하라고하고 세대주의 이름을 적어 도장을 받으로 호호방문을 하고 도장을 도라고하여 뜻도 무슨 내용인줄도 모르고 그저 찍어 주기도하고 찍어가기도 하고 가족이나 애들이 도장을 주어 찍어가기도 한 그것으로 공산주의가 좋다는 지지자들로 명단이 작성되어 있기도 했다. (면 부락마다)
② 보련가입자가 된 발단
1948.5.10. 이른바 남한에 한해 5.10선거가 실시되어 처음 제헌국회의원이 선출되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색출척결하게 되었고, 공산주의가 좋다고 뜻도 자기도 모르게 지지명단에 올려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공산주의 지지자로 분류 정부가 보도 관찰 보호하기 위해 명단 그대로 보도연맹자 명단으로 전환하여 만들어진 것이 보도연맹이며, 자동적으로 보도연맹 가입자가 된 것이다. 보도연맹자중에서 극소수 100명 중 1~2명은 허황된 공산주의 이념에 빠저 있는 자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때 그들은 미리 알고 피해버려서 다 살았다.
③ 학살의 발단
그 해 이북이 6.25를 일으켜 물밀듯 남침하여 서울을 함락하고 할때 보도연맹자중에 인민군에 편승 지리안내 지역정보제공 등으로 가세를 하고 있는자들이 있었다고 하여 (풍문) 비밀리에 남한 전역에(1950.7.25 ?) 보련가입된 자들을 경찰서 단위로 구금하여 조치하라는 전시령?이 내려져 거짓으로 회의가 있으니 일정한 장소로 모이라고하여 회의참석인줄 알고 제발로 모인 사람들을 교도소 등에 무조건 구금했다가 몇주일 뒤에 은밀히 학살을 자행했음.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대참혹한 비극적인 사건이 하늘아래 이루어젔음. 뜻을 알고 주도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거히(대부분 - 옮긴 이) 전시령이 내려지기 전부터 지명수배된 상태에서 피신해 있었기 때문에 주동자는 당시 다 살았음.
그때 내 나이 16세였음. 형님 형강(炯崗)은 매끌고개서 아침 밭골을 타다가 보련자 회의가 있다는 이상의 전갈을 전해듣고 자진해 가신 그후 진주에서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억울하고 처참한 죽음을 당했음. 당시 나이 28세. 이 사건은 당시 위정자만이 책임질 사건이나 해결할 길이 없고 다만 후손들이 사실만이라도 바로 알고 영원히 기억하기를 바랄 뿐이다.
1997.1.1 김 형 필 고증
세상버린 날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매년 음력 九月九日을 제삿날로 기리고 있음
덧붙이는 글 | 보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www.genocide.or.kr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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