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비서실장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임동원 특보가 국정원장 시절에 대북송금 편의제공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은 점과 대통령이 몰랐다는 대목에 대해서도 야당과 언론은 대부분 이해가 안된다는 투이다. 그러나 이 또한 국가정보기관의 조직생리를 알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선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정보기관의 비밀공작(covert action)이 비합법성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다. 비밀공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정보의 수집과 방첩활동을 제외한 정보기관이 수행하는 모든 비밀활동을 의미하며 정보기관의 역할 가운데 가장 특징적이고 고유한 업무로서 대부분 비합법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합법적 활동이라면 일반 행정기관이 수행하거나 외교적으로 해결하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기관이 그 역할을 담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상회담 자체도 국가정보기관의 입장에서는 거대한 국가공작으로 분류된다. 다만, 방법론의 측면에서 보자면 현대의 이른바 7대 대북사업에 업혀서 가는 '편승공작'을 띠고 있을 뿐이다. 국가공작의 목표는 물론 북한의 개방개혁이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은 정상회담의 성공으로 일단 1단계 국가공작을 완성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국정원은 제2단계 국가공작을 수행중일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공작은 외국 내에 자국 혹은 자국 정부에 우호적인 세력을 확대하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추진하는 공작이다. 미국 언론에서는 이를 '영향력 확보 활동'이라고 부른다. 정치공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통령, 총리 같은 영향력 있는 인사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테면 대북 정치공작의 경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남 인식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상회담은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그럴 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을 피한 DJ
국가정보기관은 기본적으로 대내·대외적 중대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합리적 결정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이 조직의 생래적 특징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의 비밀공작은 본질적으로 비합법적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기관이 수행하는 비밀공작의 하나하나 마다 대통령에 대한 보고와 승인과정을 거친다면 이 지구상에 살아남을 대통령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공작의 생명은 보안인 것이다. 그러나 보안이 누설되었을 경우에는 흔히 국가 최고 책임자나 정보기관 책임자는 그런 사실을 몰랐으며 하부 조직원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일이라고 부인하는 '도마뱀 꼬리 자르기'가 일반적인 관행이다. 이를 가리켜 미국 언론은 '그럴 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1960년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정찰기 U-2기가 소련 영공에서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기는 몰랐던 일이라고 부인했다. 그 이후 미국은 1974년 칠레 아옌데 정권의 전복(顚覆)을 기도한 CIA 비밀공작이 밝혀진 것을 계기로 대통령과 의회의 승인 없이는 비밀공작을 추진할 수 없도록 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에 이란 무기를 니카라과 반군에게 판매한 이른바 이란-콘트라 스캔들이 발생했을 때 존 포인덱스터 제독은 자기가 대통령의 '그럴 듯한 부인'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레이건 대통령에게 이 공작에 관해 보고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처럼 대통령의 면책을 위해 일부러 보고하지 않는 것이 정보기관의 고유한 업무수행 방식이다. 따라서 "대통령께는 내가 몰랐기 때문에 보고를 못했다"는 임동원 특보의 진술은 타당한 것이며,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그것은 대통령의 '그럴 듯한 부인'을 위한 정보기관장의 진술로서 충분히 용인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공작이 본업인 국가정보기관에 대해 위법을 탓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그럴 듯한 부인'을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시는 정상회담에 몰두할 때였는데, 현대 관계 보고를 잠깐 들은 기억이 있다. 남북 평화와 국익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큰 이의를 달지 않고 수용했다"면서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제가 지겠다"고 밝힌 점이다.
임동원 특보는 보충설명을 하며 "보좌를 제대로 못해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전날 밤새 직접 담화문 원고를 다듬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대통령은 회견 내내 초췌하고 굳은 표정이었고 한동안 눈을 지그시 감기도 했다.
햇볕정책과 김대중-임동원은 2인3각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