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쑥하니 다듬어지고 길들여진 전통

The Indian Road - Best Of Native American Flute Music Vol.1

등록 2003.02.17 18:52수정 2003.02.1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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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효순, 미선 두 소녀가 ‘살해’당한 사건은 한국인들의 대미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촛불 시위를 둘러싸고 말도 많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에서는 반미는 죽어도 안 된다는 훈계를 일삼고 있지만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미국은 결코 자의적으로 ‘선’과 ‘악’을 논할 만큼 고귀한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 음반 리뷰에서 다른 얘기 오래하기 뭣해서 이쯤해 두지만, 한국인들은 그 옛날 한일합방도 궁극적으로는 미국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주한미군을 사랑합니다’ 플랜카드를 내건 꼴통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테지만.

하지만, 사실 한국인들 정도 당한 것 가지고는 어디 나가서 미국 성토하기에는 ‘약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나 베트남, 그리고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당한 학살에 비한다면 우리가 겪어온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윤금이씨 사건이나 전동록씨 사건을 들이밀어도, 4.3 사건을 들먹이더라도 800만 인디언이 당한 비참한 죽음에 비할 바가 되겠는가. 뿐만 아니라 남미의 국민들이 미국의 정치공작 때문에 독재 권력 하에서 고통 당한 것, 신자유주의로 인한 경제적 압박 등등을 추가하면 그냥 ‘할 말이 없을 뿐’이다. 정말이지 그들은 너무도 부당하고 가혹한 일을 겪으며 살아 왔다.


직접적인 피해로 따지자면 북아메리카 원주민, 다시 말해 인디언만큼 크게 당한 이들도 없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 이후 질병과 살육 등으로 무려 800만 이상의 인디언이 죽음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 특유의 문화와 언어 등이 교묘하고 잔혹한 미 제국주의 하에 말살당했고, 더 나아가 영화와 각종 서적을 통해 피해자인 인디언이 가해자로 둔갑하는 비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아마도 인디언을 잔인하고 미개한 야만인으로 그린 미국 영화를 한번이라도 본 이들이라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행한 미국에 대한 ‘항거’가 야만인들의 폭거로 뒤바뀌었다.

그렇게 학살되고 압살되고 말살된지 어언 수 백년. 찬란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고고했던 문화는 사라지고 몇 남지 않은 인디언들은 좁다란 보호 구역에서 근근이 명을 이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도 자신들의 방언과 관습과 문화만큼은 아둥바둥 붙든 채. 폭력적인 침략자들에게 자신들의 드넓은 영토를 송두리째 내주고서 말이다.

한국에서의 인디언은 미국인들이 그네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하긴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극악한 빨갱이로 아는 이들이 대다수인 한국이니, 인디언들을 미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괴물들로 인지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처럼 한국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이념적인 굴레가 그만큼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잔뜩 억눌려 있는 셈이다. 미국 영화, 저서, 그리고 방송과 한국 언론에서 똥오줌도 못 가리고 무차별 재생산한 미국식 가치관이 홍수를 이루고 세뇌 작업을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다.

아니야 말로 콜롬버스가 침략자이고 살인마이지 어떻게 동양의 작은 나라 국민 관점에서도 ‘위인’일 수 있는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인디언들은 ‘무조건’ 피해자이며, 그들이 자기방어적으로 행한 어떤 잔혹한 행동도 넓은 관점에서 보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정당방위’에 해당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시각 조정과 재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다.


a The Indian Road - Best Of Native American Flute Music Vol.1

The Indian Road - Best Of Native American Flute Music Vol.1 ⓒ 배성록

그런 의미에서 월드뮤직과 시에스타 레이블 소속 뮤지션 소개에 앞장섰던 알레스 뮤직이 새로 선보인 이 편집음반 [The Indian Road] 시리즈는 일청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간 영화와 서적을 통해 인디언의 이미지와 생활 풍습은 어렴풋이 소개가 되었다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디언 음악을 들어봐야 하는 이유는, 남미의 누에바 깐시온이나 꾸바의 누에바 뜨로바를 알아봐야 하는 이유와 상통한다. 우선 음악에 담긴 메시지가 민중들의 애환, 분노 등을 전달할 것이고, 사용된 악기나 선법 등을 통해서는 생활 문화에 대해 보다 심도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


가령 빅토르 하라(Victor Jara)의 곡을 통해 칠레 민중들의 정서를 접하고, 그 나라 고유 음악의 요소를 추출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디언 음악의 소개는 늦었지만 의미 깊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장황했던 앞의 사설들에 비해, 정작 소개된 첫 음반은 다소 예상을 빗나간 내용물을 담고 있다. 앞으로 두 장의 시리즈가 더 발매될 예정이라니 지켜봐야겠지만, 이 1번 시디만으로는 인디언 음악과 그들의 정서에 대해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 하다. 철저히 정적인, 뉴에이지에 가까운 음악들 위주로 선곡되었고, 그에 더해 구슬픈 플루트 선율 위주로 구성되어 마치 ‘한국인이 좋아할 법한 인디언 음악’이 기획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꾸바 음악처럼 속시원히 미제에 일갈하고, 리드미컬한 퍼커션 난타와 황홀한 가창이 이어지는 음악이 아니다. 어찌보면 청승맞다고 할 수도 있을법한 팬플룻 선율은 안데스 음악을 연상케 하고, 인생의 지혜를 담은 노랫말은 박노해 선생 마냥 ‘도사’가 된 듯 밍숭맹숭하고, 이래저래 기대와는 틀리다. 아마도 필자는 꾸바 뮤지션들처럼 혁명적이고 강렬한 음악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세 장의 시리즈 가운데 첫 음반이라 ‘안전빵’만 모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음반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메리 영블루드(Mary Youngblood), 조안 셰난도(Joanne Shenandoah)를 비롯해 현재까지 인디언 문화를 고수해온 이들, 다시 말해 인간 문화재나 진배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수록곡 역시 5음계나 6음계를 중심으로 안데스 음악과 상통하는 ‘단순’하고 구슬픈 플룻 선율, 거기에 이따금 북이나 막대기와 같은 인디언의 전통 퍼커션이 얹어지는 식이 대부분이다. 또한 ‘휘슬(Whistle)’이라 해서 새의 뼈로 만든 악기도 종종 등장하는데,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물론 리듬감과는 거리가 멀고 새 울음 소리와 같은 효과를 내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음반 전체가 별다른 리듬 파트 없이 단조의 절절한 선율로 메워져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극소수 보컬 곡의 메시지 역시 “인생에는 너 홀로 넘어야 하는 많은 언덕들이 있단다” 내지는 “사람은 홀로 인생에서 숙고하여 선택한 하나의 길을 가지만 그 길은 진정 끝없는 원이다” 따위의 ‘잠언’과 인디언 전통의 자장가 위주이다. 억눌린 민족 특유의 전투적이고 강성을 띄는 메시지를 기대했던 필자로서는 한방 먹은 셈이다.

어이없는 것은 기타나 피아노와 같은 서구의 악기가 등장하는 시점이다. 세 번째 트랙인 부터 느닷없이 기타가 등장하고, 이어지는 곡 에서는 첼로가, 백인들로부터의 탈주를 노래하는 에서는 피아노가 사용되어 맥을 빠지게 만든다. 음악 팬으로서도 해독 불가능할 전통 음악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음반 내 수록곡 대부분에 이런 서구 악기가 동원됐다는 사실에 김이 빠지는 것이다. ‘뭐야, 타협했잖아’ 하는 기분 있잖은가.

이런 이유로, 이 인디언 음악 시리즈는 계속되는 후속작을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본작은 처음 소개된 음반이라 그런지 한국적 정서와 상업성을 고려하느라 ‘정작 중요한 무언가’를 쏙 빼놓은 것만 같다. 이는 단순히 미국에 침략당한 이들의 한과 분노어린 노래를 기대해서도 아니고, 아메리카 전통 음악 특유의 격렬한 리듬감을 기대해서도 아니다. 그저, 여기 실린 것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필자는 예전에 모 교수의 사이트에서 접했던, 동물 뼈로 만든 퍼커션과 동물 가죽으로 만든 리드 악기가 어우러진 흥겹고 들썩들썩 요란한 북미 전통 음악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계속 발매될 이 시리즈의 2번째, 그리고 3번째 시리즈를 기대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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