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인사회에서 다수의 친일경력자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숨긴 채 공공연하게 각종 대외활동에 나서고 심지어는 각종 주요단체의 장을 맡고 있는 등 한인사회의 여론조성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친일 경력자 김봉건'이 막고 나선 촛불시위?
이 같은 현상은 벌써 수십 년째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받아들여져 온 공공연한 사실이다. 친일경력자들의 영향력이 한인사회의 깊은 부분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민 한인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매우 중대한 사안으로 비춰지고 있다.
지난해 말 LA에서 열린 '백악관 항의 방미투쟁단'과 지역 교민들이 함께 효순, 미선 추모 촛불시위를 벌이던 현장에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나타나 잠시 소란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재미 6.25 참전동지회', '재미 KLO 8240유격대 전우회', 그리고 '한인 재향군인회' 등 단체의 회원들이라고 밝히며 평화로운 추모시위 장소에 난입, 재외 동포들과 함께 하는 행사를 통해 한국의 촛불시위를 설명하고 같은 민족으로서의 교감도 나눌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방미투쟁단' 일행을 아연하게 했다.
'방미투쟁단'은 여중생 사망사고 책임 미군 무죄판결 항의와 SOFA 개정 요구 한국국민 130만명 서명 용지 전달을 위해 미국을 방문중이었다. 시위장소에서 이들 모임의 회원들은 미국이 한국의 혈맹임을 강조하며 '반미 감정을 부추기는 이러한 불순한 시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정상적인 행사진행을 방해하다가 시위대 측의 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행사장에서 떠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날 언론사와 촛불시위대 앞에서 촛불시위의 부적절함과 자신들의 반대의사를 설명하던 6.25 참전동지회 회장 김봉건씨는 재작년 LA 지역에서 있었던 '역사정의 실현을 위한 친일 경력자 명단공개' 당시 과거를 반성하고 한인사회에서의 활동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받은 두 명의 친일 경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여중생 사건의 반미 감정으로의 확대와 그로 인한 한미관계의 악화를 우려하던 사람들의 입장이 촛불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지역 교민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주목을 받고 있다.
친일경력 관련한 증거자료까지 확보된 명단공개 기자회견
2001년 라디오서울이 취재 보도함으로써 공론화가 된 LA 지역 친일경력 인사들의 동포사회 활동상황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기자회견 당시 일차적으로 실명 거론된 친일경력자는 앞서 얘기한 재미 6.25 참전동지회의 현 회장인 김봉건(76세)씨와 노인복지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이승복(83세)씨 등 두 사람이다.
김봉건씨는 일본 육군 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가와사끼 소재 일본 육군 유년학교 출신으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경력으로 분류됐다. 또한 이승복씨는 일본 관동군 헌병대 출신으로 만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탄압에 앞장서고 해방 직후 경북 김천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조선인 발포사건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그들의 친일경력에 대한 반성은커녕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친일행적을 자랑처럼 늘어놓던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이들이 일본 교과서 역사왜곡 항의 시위에서 소리 높여 반일을 외치는가하면 일제징용피해자모임에 관여하는 등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여 독립유공자 측의 관계자들로부터 오랫동안 공분을 사온 것이다.
이들의 친일경력은 당시 조사과정에서 본인들의 입으로 증언한 내용을 담은 녹취테이프와 함께 증거로 제출됐으며 이들의 발언을 들은 적이 있는 여러 증인들이 확보돼 있는 상태였다.
기자회견에는 LA 한인청년단과 독립동지회를 비롯한 많은 지역 한인단체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한국의 MBC와 연합통신 등 특파원들도 취재에 나서는 등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 바 있다.
역사정의 실현을 위한 친일경력 폭로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명단공개와 기자회견이 당사자가 스스로 밝힌 증언만을 기초로 한 조심스런 인물 선정에 머물고 그 외의 친일 경력 의혹을 받던 50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제외됨으로써 명단발표의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또 담당자에 따르면 제보를 통해 확보한 나머지 50여명의 명단을 서울의 민족문제연구소에 보내 친일 경력에 대한 조사를 의뢰해 두었으나 아직도 그 조사결과를 통보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밝혀 애초에 이루고자 했던 역사정의 실현과 친일 경력자들의 반성 없는 공적 활동에 일정한 제재를 가하려던 목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일회성 행사로 그치고 말았다는 비판까지 제기되었다.
김봉건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당시의 기자회견은 전부 엉터리였고 나를 위시한 자유 민주주의자들을 음해하기 위한 친북세력의 공작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기자회견 때 밝혀진 내용들에 대해서 그는 "내 나이가 겨우 18살이던 때"라며 "그 어린 나이에 무얼 알아서 친일을 하겠느냐. 그 사람들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한 "내가 나서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해봐야 나만 더럽혀 지는 것"이었다며 "큰 신경을 쓰지도 않았으며 그 이후로 나와 내 가족들이 이런 쓸데없는 소문으로 인해 얻은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대신 일본에 합병된 덕에 우리나라 발전"
그러나 한국에서 친일 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신공격을 당한 사람들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꽤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는 피해를 겪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말을 돌려서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어차피 조선이라는 나라는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 가운데 어느 한 나라에게 강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오히려 조선을 합병한 나라가 일본이었던 덕분에 해방 후에 우리나라가 빨리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지 않았는가"라고 설명하며 오히려 설득하려 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태도를 통해 그가 여전히 일본의 조선침략이 역사적인 필연이었으며 근대화에 도움을 받았다는 전형적인 친일세력의 인식을 유지하고 있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근래에 와서 한인사회 내의 어떤 사람도 이러한 친일 경력을 가지고 문제를 삼고 이의를 제기해서 그가 곤란에 빠지게 한 경우는 없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육성을 담은 녹취테이프까지 있는 상태인데도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남북이 분열된 상황임을 이용한 책임 회피를 시도하고 도리어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친일 경력이 무슨 자랑인가"
김봉건씨의 이같은 인터뷰 내용을 전해들은 LA 광복회의 전(前) 회장 장영원(74세)씨는 "헐뜯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며 "내 두 귀로 똑똑히 그가 자신이 예과지원병 출신이라고 자랑삼아 말하는 걸 들었다"고 말했다.
"괜히 한인들 사이에 다툼이나 벌어지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며 조심스러워하는 장영원씨는 "밝힐 건 밝히고 반성할 부분은 반성해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이 불쌍해 보인다"면서도 "사실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여 얘기했다.
일본의 군인이나 경찰로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 해방 후 특채가 된 사람은 육군본부에 군력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독립동지회 회장인 황장연(80세)씨는 더욱 강경한 어조로 김봉건씨의 태도를 규탄하고 나섰다.
"LA지역에 있는 많은 친일파 출신들이 도리어 자신들의 친일 경력을 무슨 자랑처럼 말하고 다니면서도 이런 저런 단체에 뻔뻔스럽게 명함을 들이밀고 심지어는 단체장까지 맡아서 지역 행사마다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던 그는 "이 자들이 하도 나서대니까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일을 열심히 하고 조국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들로 여겨지곤 한다"고 헛웃음을 쳤다.
"그런 사람들이 오리발을 잘 내밀기는 하지"라고 말하던 그는 "이완용 후손들이 자기 땅을 찾겠다고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는 말을 듣고 분이 치밀어 올랐던 적이 있다. 반성을 하고 자중 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게 말이 되는가?"하고 되묻기까지 했다.
"그때도 독립운동 한 사람은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었다"면서 목이 잠기던 황장연씨는 "이제 다들 나이가 들어서 해마다 몇 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김봉건 같은 사람들 때문에 속이 상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LA 지역 광복회의 현 회장인 배국희씨는 "그런 친일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반성하고 말고 하는 것이야 그 사람 자신에게 관련된 문제이니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고 "하지만 제대로 된 사실을 사회에 알리고 올바른 역사를 밝혀내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역사의 교훈이 되어야지 않겠나"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다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서 분란 조장 말아라"
하지만 일제 식민지와 해방 이후의 실망감을 모두 직접 겪어야 했던 이들 독립유공자와 그 직계 가족들의 분노에 찬 감정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2001년 5월 친일 경력자 명단을 공개할 때 함께 참여했던 미주한인사업가협회의 회장인 강종민(44세)씨는 "이미 한번 다루어졌던 얘기를 다시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면서 "좋든 싫든 이미 한인사회의 어른인 그들을 깎아 내려서 무엇을 얻겠는가"하고 덧붙였다.
"일제에 의한 식민 시대라는 환경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이런 식으로 친일이다 아니다 하고 남을 판단하려 든다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친일하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덮어줘야지 다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서 분란만 조장한다면 누워서 침 뱉기가 될 뿐"이라고 말했다.
강종민 회장은 "지금이 시기적으로 좋은 때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미주에 있는 한인들이 힘을 모아서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아갈 때라는 그의 얘기에는 한국의 반미감정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심경이 담겨있었다. 평소에 서로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보수단체들이 '친일경력자 명단공개'에 참여한 모습이 일견 낯설게 보였음을 환기시키는 발언이었다.
이어서 그는 친일 경력자 명단공개를 추진한 사람들과 뜻을 같이한 것에 또 다른 배경이 작용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 26대 한인회장 선거에 출마한 남문기 후보의 입후보 자격요건 시비로 불거진 각 후보 지지자간의 마찰과 대립이 바로 그것. 당시 하기환 후보 지지자였던 김봉건씨 등과 감정적인 골이 생겨났고 이런 갈등이 상대후보 측 지지자들의 결심에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일부 한인들은 최근 다시 시작된 하기환 회장의 당선 무효소송으로 각 한인단체들이 또 한번 이해관계에 따른 분열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경쟁과 상호보완이라는 방법 통해 발전해야 한다
한인사회 안에서 다양한 의견이 발생하는 것은 비관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며 상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경쟁과 상호보완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한인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결국 패거리 문화와 편가르기 경향만을 가속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것은 비단 LA 지역의 동포사회에만 한정된 예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의 한인사회가 헤쳐나가야 할 문제는 '지금', '여기'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정치·경제적 발전만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과 자주권 확보라는 역사적 과제도 함께 해결해나가야 하는 지점에 서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해외동포들의 삶이 조국의 상황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역시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동포들의 조국에 대한 관심과 실천적 의사 표현이 조국의 현실에 얼마든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큰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과 몰염치를 덮어두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논하자는 사람들의 한계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 또한 이들의 지적이다. 과거는 어느 시점에서 현재와의 관계를 끝내버린 제3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제반 상황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이며 미래를 계획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는 기본적인 자료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이렇듯 중요하다면 그것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를 폄하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 | | 우리에게 일제청산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 | | | | 일본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반감의 뿌리는 매우 구체적이다. 물론 그 반감의 내용과 표현 방법에는 많은 변화가 있어왔지만 일본에 의한 한반도 강점이라는 경험이 결정적인 이유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한국 사람들 대다수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일본이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이것은 똑같은 모습으로 한인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에 의한 위안부 강제동원 증명하는 문서 발견
지난1월 3일 장태한 교수(UC Riverside, 인종학)를 비롯한 ‘한-미-일’ 민간인 공동연구팀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 연방정부 기록보관소(NARA)’에서 발굴한 자료들을 공개했다. 다음날 인터넷 <오마이뉴스>의 사회면에 보도된 문서의 내용을 보면 이는 조사를 담당한 연구자들의 개인적인 성과에 그치는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사는 이 문서가 그동안 위안부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위안부의 강제동원과 이에 대한 정부의 개입 사실만은 완강히 부인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거절해온 일본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임을 지적했다. 따라서 앞으로 일본정부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지 한국 국민들에게 매우 관심을 끄는 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사실 인정과 공식적인 사죄문제는 두 나라의 관계가 개선되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돼 왔다. 계속적인 책임회피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망언, 이어지는 형식적인 사과라는 순서를 반복해온 일본의 태도는 앞으로 계속해서 밝혀질 일본사에 관계되는 정부문서 공개를 통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이같은 문서발굴 작업은 미국정부가 지난 1999년 발족시킨 연방정부 합동 조사단인 IWG(Interagency Working Group)에 의해서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진행되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에서의 일제청산문제는 얼마만큼 진행되어 왔는가
시대가 바뀌고 묵은 감정이나 낡은 관계에 대하여 신선한 생각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한국국민들의 반일정서에는 일정한 구분이 생겨났다. 주변에 있는 문화적 경쟁상대의 하나로 대하는 것이라든지 아주 최근까지도 이어져온 불균형한 경제적 예속관계들에 대한 비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일본에 대해 접근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다양 다종한 의견들 가운데 꽤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스스로의 일제청산 문제도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얻어내겠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제 청산이 얼마나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고찰은 대다수 민족 성원 사이의 광범위한 심정적 동조라는 환경에 의해 꽤 수월한 작업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을 만들어 내고 있는 당사자들의 인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상당부분 감정적인 내용에만 근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한국 현대사에서 일제 식민잔재의 청산문제나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의 처벌문제 같은 것은 제대로 진행조차 되지 못한 채로 미루어져 왔다.
오히려 그 실상을 살펴보면 미루어졌다는 말에 어폐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미 군정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다수의 일제 협력자들은 일종의 면죄부를 획득하게 되었다. 또한 이어진 군사독재 역시 이들의 정치·경제적 기득권 유지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국민들 절대다수의 지지라는 사회적 정당성을 얻어낼 수 없었던 군사정권은 자신의 정치권력 독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한반도의 위기감을 과장하고 부추길 필요가 있었다. 전쟁의 끔찍했던 경험을 아직 잊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충분히 유효하고 더군다나 효과적이었다.
“한국의 반공은 사실 반공주의자들에 대한 공포가 그 근원”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가 오직 폭압의 군사독재를 자행한 파시스트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에게 협조한 친일파들에 의해서 가공되고 강요된 것이라고만 말하는 것도 지나치게 일부분만을 부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그르치게 만든 주범이 ‘반공이념’ 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다가 이념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는 것도 사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어느 학자는 “한국에서 보여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는 사실 반공주의자들에 대한 공포가 그 근원이라고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의견에 대한 찬반논의를 떠나서 한국 현대사에서 드러나는 공산주의에 대한 과민반응과 이어진 무자비한 탄압들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철저한 조사나 증거 확보를 위한 절차 따위를 무시해가며 휘두른 폭력성이 추구하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집단을 위한 희생적 제의에 대한 칭송. 일사분란함이 가져다주는 이익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강요.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가해자의 무리가 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분석보다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발본색원을 빙자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한 것으로 평가되는 과거 친일세력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 국민들의 반발이나 자발적인 의지 같은 것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집권 세력(미 군정, 전시정부, 군사독재정권 등)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거래를 통해 관계를 맺기 원하는 소수의 협조자였다. 그리고 이 특별한 거래의 내용은 ‘생존권 보장’ 대 ‘협력과 충성’이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친일세력들의 주류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해주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정치세력의 반복적인 등장 속에서 한국의 현대사는 더욱 암울한 과정을 겪어와야 했다.
과거 사건에 대한 시각의 객관화와 국민들 사이의 공유
“평화에 대한 죄,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은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처벌할 수 있다”
나찌 전범들에 대한 처벌에서 그들이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한 일종의‘공소시효’ 적용을 제외시키는 내용의 이 <뉘른베르그 헌장(1946년 제정)>이 담고 있는 정신의 요체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 있겠다.
패전국 독일의 새 정부는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이것을 수용하고 실천에 옮겼다. 새로운 목표와 전망을 제시해야 했던 전후 독일의 정부에게 “과거 사건에 대한 시각의 객관화와 국민들 사이의 공유”는 아주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포함하는 당사자들이 겪어야 할 상황변화와 조건의 반전들에 대한 개인적인 대응-도피나 변명, 참회 혹은 분노와 복수심 등-과는 별도로 제기된 필요였다. 비판적으로 봤을 때 전쟁의 책임자로서 협조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독일 스스로는 둘째로 치더라도 가혹하리만치 철저하게 나찌의 협조자들을 처단했던 프랑스의 예를 보면 이 문제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관건은 사회통합과 그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이해와 동의를 어떻게 획득해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여전히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을 키워낸 일본 제국주의
물론 사회통합이 의견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다른 의견들이더라도 서로의 실제를 인정하며 공동체 내에서 대화와 타협을 모색하는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만이라도 확보가 되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좌·우 연립정권 같은 것이 곧잘 등장하곤 하는 유럽의 정치 선진국들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한국의 과거 친일 세력들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나찌를 들먹이는 것이 지나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의 우리 민족 말살정책은 히틀러 식의 유대인 집단 학살과는 다르다는 이유를 들면서. 하지만 오십 년이 넘도록 같은 민족을 체포, 고문, 살해했던 사실에 대해서 여전히 반성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키워낸 일본 제국주의를 나찌에 비유하는 것이 과연 지나친 것인가. | | | |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주간 오마이뉴스 LA> 제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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