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영정 현판안병기
눈쌓인 무등산 상봉이 또렸히 보이기 시작한다. 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 노정기>에 나오는 흥보 제비가 "흑운 박차고 백운 무릅쓰고 거중에 둥실 높이떠" 흥보 움막에 당도 허드키 나도 그렇게 먼 길을 와 '그림자가 쉬고있는 정자' 식영정에 도착한 것이다. 식영정으로 오르는 층계 옆 동백나무는 아직 꽃을 피지 않고 있었다. 꽃을 보지 못한 서운함을 지그시 누르고 계단을 오른다. 식영정은 여전히 구부러진 소나무며 팔작지붕의 서까래를 괴고 있는 퇴보도 멋드러진 굴곡을 보여 주었다. 어떤 시간은 숙성되어 기쁨이 되고 어떤 시간은 매우 더디게 쌓여서 고통이 되는 것일까.
우리 마을에서 면 소재지인 연천 까진 십리길이었다.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면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면 지친 어린 몸은 식영정 마루에서 한 잠 늘어지게 잠을 청했다. 여기서는 그림자만 쉬어가는 것이 아니다.선들선들한 바람도 내 이마의 땀을 씻어 주며 쉬어가곤 했다. 회상 속에서 몇 장의 흑백사진이 인화되고 마침내 내 어린 날의 시간들은 서서히 기쁨으로 발효되어 간다. 식영정 마루에 앉아서 무등산과 몇 번 눈을 맞춘다. <쉬어가는 곳>이라는 황지우의 시를 생각하며 식영정을 떠났다.
내가 여름 나라 아래 당도하니
식영정(息影亭) 온 채가
저 아래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노인들이 큰 나무 수령(樹齡) 아래에서
배꼽을 내놓고
손으로 부채질한다
멀리 무등산 동쪽 산록이
군용 담요를 뒤집어 씌워 놓은 듯
한낮 햇살 받아 더욱더 녹록(綠綠)하다
모든 길은 노인만이 안다
금곡(金谷)으로 들어가는 버스 이정표
코카콜라 간판 아래
이따만한 웬 누렁 개 한마리가
섬찟하게 홀로 앉아 있다
너 이노오옴!
헛것이 수작을 부리다니!
돌멩이가 한여름의 으스스한 정물(靜物)을
깨겡껭, 깨뜨려 놓는다
녹은 아스팔트에 발자욱 남기며
헛것이 쩔뚝쩔뚝 사라진다
황지우 詩 <쉬어가는 곳> 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