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를 건넌 챔버 팝의 상큼한 변종

Tahiti 80 'Wallpaper for the Soul'

등록 2003.03.07 20:51수정 2003.03.0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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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버 팝(Chamber Pop)에서‘챔버(Chamber)’가 ‘방'을 의미한다는 점을 안다면 대강 어떤 음악인지 감이 올 것이다.

실내악처럼, 단아하고 아기자기한 음악. 단촐한 악기 구성을 가진 음악.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놓은 노랫말을 가진 음악. 이것이 일반적인 챔버 팝의 스타일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 바보인 벨 앤 세바스찬(Belle and Sebastian), 디바인 코미디(Divine Comedy), 러퍼스 웨인라이트(Rufus Wainwright) 등은 영국 혹은 그 비슷한 동네의 ‘권위 있는 음악 가문’ 출신(그러게 ‘세바스찬’ 아닌가)으로서, 비틀즈부터 닉 드레이크와 도노반 등을 두루두루 거쳐가며 단아하고 오밀조밀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음악을 선보여 왔다.

방구석에 심약하게 웅크리고 앉아 꽃잎 떼어내며 들을 법한 그런 음악!

하지만 일반적으로 챔버 팝은‘선배들의 후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을 듣고 있기도 하다. 비틀즈 시절에서 별로 진보한 게 없다는 평가도 있다.

이런 얘기들은 주로 작곡과 연출력이 중요시되는 챔버 팝의 특성을 무시한 폄하임에도, 결코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날카로움이 있다. 70년대 그 음악들에서 별 발전은 없었던 게 사실이니까.

이런 측면에서, 챔버 팝의 변종에 가까운 타히티 80의 음악은 일종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은‘영국과 그 비슷한 동네’가 아닌 바다 건너 프랑스의 젊은이들이니 말이다.


타히티 80의 음악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편견을 갖게 할 만한 단상 두 가지. 우선 엔지니어 겸 프로듀서로 아이비(Ivy)의 멤버 앤디 체이스(Andy Chase)가 참여했다는 사실.

그의 이름을 디바인 코미디의 음반 속지에서 발견했던 사람이라면, 타히티 80에 대해서도 섣부른 단정을 내릴지 모른다. 또 다른 하나는 비틀즈의 [Let It Be], 닉 드레이크의 음반 등에서 모습을 보였던 리차드 휴슨(Richard Hewson)이 오케스트레이션을 담당했다는 점.


이 사실까지 알게 된 순간, 벌써 수많은 챔버 팝 밴드들의 잔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고 결결이 고운 오케스트레이션이 느껴지며 대충 ‘어떤 음악인지 알겠다’ 싶지 않은가? 잠시 참으시라. 이 친구들의‘회수를 건넌 챔버 팝’은 영국산 귤과는 맛이 많이 다르니까. 탱자가 되기는커녕 크고 싱싱하고 달콤하게 변했다. 껍질이나 까고 나서 판단하도록 하자.

머릿곡인 "Wallpaper for the Soul"부터 무언가 확연히 다르다. 둥실둥실 떠오를 듯한 몽환적 무드, 분명 챔버 팝의 내음이 묻어남에도 일렉트로닉하고 이그조틱한 사운드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어지는 복고색 찬연한 디스코 "1,000 Times"과 설탕처럼 달콤한 "Separate Ways"에 이르면 그‘다른 점’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우선 타히티 80의 음악에서는 영국산의 우울 심드렁 모드가 소거됐다. 오히려 봄옷 차려입은 동네 아가씨처럼 산뜻하고, 화사한 분위기가 음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느낌은 보컬 사비에르의 생기 넘치면서도 감각적인 목소리뿐만 아니라, 혼과 스트링과 일렉트로닉 비트가 결합해 만들어지는 환상적인 분위기 탓도 있겠다.

언뜻 보기에 이질적인 것도 같은 요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매끄럽고 발랄한 사운드로 완성되었다. "Get Yourself Together"나 "Happy End"는 너무도 달짝지근해서 혀가, 아니 귀가 녹아버릴 것 같고, 쟁글거리는 기타 라인이 톡톡 튀는 "The Other Side"를 듣노라면 둥실 날아오를 것만 같다.

그럼 너무 당도가 짙지 않느냐고? 전작 [Puzzle]은 더 달고 가볍고 사랑스러웠는데 뭘. 이번 음반은 그래도 많이 차분해진 편에 속한다. 그래도 영국산 귤보다 달다. "The Train"처럼 기타 디스토션이 전면에 나선 곡에서마저도 달다.

[Wallpaper for the Soul]은 분명 챔버 팝의 새로운 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음반임에 틀림없다. 영국도 캐나다도 아닌 곳에서, 그 방콕 음악은 이렇게 화사한 옷을 갈아입고 있었던 것이다. 작고 가엾은 소년이 죽어가는 꽃을 매만지며 들을 법한 그 음악이, 생글생글 미소를 띄며 발랄하게 거리를 뛰어다니는 형국이다.

또한 밴드로서도 전작 [Puzzle]에 비해 보다 오밀조밀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선보인 음반이라 할 수 있겠다. 마음껏 복고적이고 감각적인 전작이 다소 청자에게 싫증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번 음반은 오히려 귀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흡착력을 지녔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을 사탕 사운드니까. 확실히 세계는 넓고, 음악은 많으며, 영국과 미국만이 전부가 아니다. 타히티 80의 이 음반은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당도 100%의 음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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